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성(聖)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된 스페인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 1,000년 이상 이어진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를 초월한 세계적인 도보여행 코스입니다. 800km가 넘는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길를 많은 순례자들이 걷는데요. 한 달 정도 시간이 소요돼요. 우리나라에서는 충청남도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 알음알음 알려져 있지만, 전라남도 신안에는 사라졌다 다시 열리는 바다 위 '12사도 순례길'이 있어요. 번잡한 일상과 거리를 두고 조용한 내면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 곳을 '섬티아고'라는 애칭으로 부른답니다.
# 신안 순례자의 섬을 건너는 '12사도 순례길'
'섬티아고'로 알려진 순례자의 섬은 지난 2018년 전남의 '가고싶은 섬'으로 선정된 병풍도에 딸린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 그리고 딴섬을 잇는 길입니다.
신안군 증도면에 있는 이 작은 섬들의 주민은 50여 명이 전부인데요. 대부분 기독교 교인입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우리나라의 조형 예술가 10명은 이 섬들에 예수의 열 두 제자 이름을 딴 12개의 작은 예배당을 세웠어요.
12사도 예배당은 선착장, 노둣길, 마을 어귀와 언덕, 해안과 저수지를 비롯해 섬 곳곳에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3평 남짓한 단층으로 울타리도 없고 문은 열려 있어 거리낌 없이 들어가 볼 수 있어요. 굳게 잠겨 있거나 육중한 문을 밀고 들어가기 부담스러운 도시의 교회와는 달리 순례자를 환대합니다.
섬과 섬 사이는 애초 징검다리가 있었지만 주민들이 돌로 바다를 메우고 시멘트로 포장해 지금과 같은 노둣길을 만들었어요. 밀물 때는 찰랑거리는 수평선이 되고 썰물 때는 노둣길이 드러나요.
12사도 순례길은 하나의 예배당에서 노둣길을 따라 다른 예배당으로 12km가 이어지는데요. 이 길은 '자발적 가난, 즐거운 불편'이라는 가치를 품고 있어요.
12사도 순례길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것은 물이 차면 사라졌다가 서너 시간 뒤 물이 빠지면 길이 열리는 신안 바다랍니다. 하루 두 번 빠지는 물때를 잘 맞춰야 다섯 섬을 모두 돌아볼 수 있어요.
# 섬티아고 출항지 신안 송공항과 천사대교
아침 6시 30분 대기점도로 출항하는 첫 배를 타기 위해 신안의 작은 항구 앞에 섰습니다. 다도해 섬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바다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요.
아침 해무와 겹쳐 바다는 푸른 뭍 같고 고깃배 서너 척이 그 위에 놓여 있어요. 고요하고 몽환적입니다. 곧 예수가 물 위를 걸어올 것 같아요.^^ 방랑의 걸음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을까요. 오늘은 이 바다 위를 걸어갈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6시 50분, 배가 송공항 부두에서 밀려나가기 시작해요. 배 이름은 '천사 아일랜드'입니다. 배가 움직이면서 비로소 시원한 갯바람이 이마에 와닿는데요. 작지 않은 여객선에 승객은 채 스물이 되지 않아요. 대기점도까지는 앞으로 한 시간 남짓.
배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하얀 다리를 향해 나아가요.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흰 교량은 길이가 7.22㎞나 된답니다. 2개의 주탑 사이 길이를 1004m로 건설하고 '천사대교'라고 이름 지었어요. 지금 흰 '천사'를 타고 천사의 품 아래를 지나는 중입니다.
# 오래된 새 길, 대기점도의 다섯 예배당
# 1. 건강의 집 '베드로' (김윤환 작가)
대기점도항으로 순례자의 섬 '섬티아고'에 들어온 순례자는 '건강의 집'에서 '12사도 순례길'을 시작해요. 베드로의 예배당은 그 첫 번째 자리에 있어요. 석회로 마감하여 눈부시게 하얀 외벽과 지중해풍의 파란 돔 지붕이 그리스 산토리니를 떠오르게 해요.
파란 문을 열면 병풍도를 향해 난 창 위에 십자가가 있고 양쪽으로 단정한 수채화가 그려져 있어요.
'건강의 집'은 순례자의 기도처이면서 멀리서도 섬을 알아볼 수 있는 등대 역할을 하고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기소가 되기도 합니다.
예배당 옆에는 키 작은 종루가 있어요. 종을 치려면 몸을 숙여야 하는데요. 몸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진 베드로의 예배당은 순례자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순례를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어요. 첫 번째 '건강의 집'에서 섬티아고 순례를 시작하며 몸과 마음을 숙이고 종을 힘차게 쳤어요.
갯벌을 가로질러 길게 뻗어 나온 선착장이 순례의 출발점입니다. '네가 어느 길 위에 있던지 너를 응원한다. 건강하렴, 사랑한다.'
# 2. 생각의 집 '안드레아' (이원석 작가)
병풍도로 이어진 노둣길이 시작되는 대기점도 북촌마을 앞동산에는 '생각의 집'이 서 있어요. 안드레아의 예배당입니다. 밀물과 썰물을 '해와 달'로 해석해 네모지고 둥근 공간이 한데 붙어있는 작품을 만들었어요. 섬 주민이 사용하던 절구통과 여물통을 건물의 일부로 넣어 섬 주민의 삶과 풍경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죠.
두 개의 돔 모양 지붕 꼭대기에는 십자가 대신 하얀 고양이 두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요. 마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길고양이를 섬의 수호신으로 상징화 한 거예요. 예배당 곳곳에 섬 이야기가 배어 있는 셈입니다.
해와 달의 공간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실내의 독특한 디자인도 아름다워요. 변하는 달 모양 창을 낸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네모진 공간 천정의 해 모양 돔에서 빛이 들어와요.
둥근 공간 천정의 달 모양 돔에서도 빛이 들어와 둥근 돌 평상 위에 떨어져요. 예배당 안에는 산란한 빛이 가득하답니다.
초를 올리는 붙박이 선반을 만든 벽면 위에 발굴한 유물처럼 박힌 십자가가 있어요. 순례길을 걸으며 생각을 그치지 말고 사유 속에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라는 말씀 같아요. 작은 사유의 공간에서 평안을 얻고 내 마음에 집중합니다.
조그만 여물통 창문으로 내다보면 노둣길 건너 고즈넉이 자리 잡은 아름다운 병풍도가 보여요. 외줄처럼 섬과 섬을 이어 놓은 긴 노둣길을 보고 있으면 어떻게 이 길을 놓았을까 주민들의 땀을 헤아리며 고개가 숙여집니다.
# 3. 그리움의 집 '야고보' (김강 작가)
'그리움의 집'은 꼬불꼬불 언덕길을 오르다가 길이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곳에 있어요.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오두막』에서 맥이 '파파'를 만난 장소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상상했어요.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파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의 예배당은 벽돌를 쌓고 하얀 석회로 마감한 몸체 양옆으로 열 개의 나무 기둥을 세워 처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기와를 얹었어요.
예배당 앞 꽃을 심은 작은 화단, 입구의 도리아식 하얀 기둥, 나무 조각을 모아 만든 출입문은 주변 자연과 잘 어울려요. 뒷벽에는 분홍색 음각 십자가가 반전 매력입니다
반사경을 끼워 안이 보이지 않는 출입문을 열고 예배당에 들어서면, 신라성덕왕신종의 '비천상'에서 이미지를 가져온 부조가 있어요. 부조를 둘러싼 다섯 창으로 분홍빛이 들어와요.
내 안의 예수는 그냥 말 걸면 그도 응답해 주었을 텐데, 그에게 다가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는 늘 내 안에서 저 분홍빛처럼 평안한 빛을 비추고 있는데, 내가 외면해 왔던 것인지 모릅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오두막에서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고 긴 꼬불 길이 눈에 들어와요. 지난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순례길이었습니다.
# 4. 생명평화의 집 '요한' (박영균 작가)
'행복의 집'에서 대기점도를 시계 방향으로 돌아 남쪽으로 가면 남촌마을입니다. 수차가 도는 염전이 내려다보이는 얕은 언덕에 요한을 상징하는 '생명평화의 집'이 있습니다.
박영균 작가는 차곡차곡 둥글게 벽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를 석회로 마감했어요. 생명을 나타내듯 단정하고 하얀 예배당의 전체 모양은 남성성을, 출입문은 여성성을 상징해요. 외뿔을 단 유니콘이 문지기처럼 한쪽에 서 있답니다.
예배당 안은 파스텔톤 타일이 깔려 있어 화사하고 따듯해요. 하얀 벽을 따라 생명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성모를 상징하는 스테인드글라스 장미창으로 들어온 빛이 이 생명의 나무를 키우고 있어요. 예배당 전체가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성스럽고 평화로운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출입문 반대쪽에 난 긴 바람창 아래에 무릎을 꿇을 돌이 놓여 있어요. 생명이 태어나 살아가는 예배당 바깥세상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창 너머로 무덤이 보여요. '삶은 죽음을 향한 끊임없는 접근'이라는 톨스토이의 말처럼, 태어난 모든 생명은 죽음을 향해 자신만의 보폭으로 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일깨웁니다.
'행복의 집' 문 앞에 서면 염전 너머로 병풍도가 펼쳐져 있어요.
# 5. 행복의 집 '필립' (장미셀 후비오·파코·브루노 작가)
대기점도의 남쪽 끝, 소기점도로 노둣길을 건너기 전 다섯 번째 '행복의 집'이 순례자를 맞이해요. 필립의 예배당입니다. 장미셀, 파코, 브루노 세 명의 프랑스 남부 툴루즈 지방 출신의 예술가들은 고향의 붉은 벽돌과 섬에서 채취한 갯돌을 사용해 섬 언덕 위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세웠어요.
적삼목과 동판을 덧대고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잘라 얹은 지붕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뾰족한 첨탑 모양으로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어요. 그 꼭대기에는 작고 소박한 물고기 조각이 올라가 있습니다. 전체가 날렵한 물고기나 날센 새 같아요.
섬사람의 삶과 시간이 담긴 절구통은 입구 벽의 열린 둥근 창문이 되었고, 이 창을 통해 맞은편 벽의 짙푸른 유리블록 십자가를 볼 수 있어요.
전통 나무배 형상을 한 실내 구조도 특이해요. 유리 십자가 아래 납작 엎드렸습니다. 숨을 돌리고 평안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성스러운 한 평 공간이면 충분할 거예요. 나의 생은 더 멀고 더 낮은 곳, 더 험악한 시간 속에 머물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 신안 섬티아고 '12사도 순례길' 여행 팁
'2사도 순례길' 이어지는 섬티아고에 가기 위해서는 전라남도 신안의 송공항에서 여객선을 이용해야 해요. 배는 하루 네 번 출항하고 소악도, 소기점도, 대기점도를 차례차례 중간 기착지로 들렸다가 병풍도에서 회항해 송공항으로 돌아옵니다.
'2사도 순례길' 물때를 잘 맞춰야 노둣길로 이어진 5개 섬을 모두 돌아볼 수 있어요. 여객선 운항시간표와 물때표를 잘 맞춰 여행을 계획하세요.
신안 섬티아고 여객선 출항지, 송공여객선터미널
• 주소 : 전남 신안군 압해읍 송공리 718-64
• 운항시간 : 송공항 출항 (신분증 지참)
* 매일 06:50, 09:30, 12:50, 15:30
* 송공항 → 대기점도 1시간 소요
• 승선료 : 성인 6,600원 / 중고등학생 5,900원
• 차량선적 : 경차 10,000원 / 승용차 15,000원 / 승합차 20,000원
• 문의 : 해진해운 061-279-4222 / 061-244-0803
대기점도 물때표
https://www.badatime.com/1324/daily
아스라이 펼쳐진 갯벌과 수차가 돌아가는 염전, 그리고 소나무숲과 신우대숲, 섬티아고의 마을 길을 걷는 동안 마음은 쉼을 얻고 어둠이 희석돼요. 뜨거웠던 여름을 지나 풀벌레 소리 짙어지는 가을, 풍랑에 휘말려 물속에 빠져들던 베드로처럼 삶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초조와 불안이 엄습할 때가 있죠. 그런 불안을 떨쳐내기 힘들다면 신안의 바다 위 순례길을 걸으며 나와 삶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되찾아 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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