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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물결이 밀려드는 월출산 차밭 산책, 강진 설록다원 (feat. 백운차실의 원조 말차)

솟아오른 바위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푸르른 차밭의 부드러운 곡선이 두 눈과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녹차하면 제주와 보성이 먼저 떠오르죠. 하지만 전라남도 강진에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다원이 있다는 것을 아는 분은 드물 거예요.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산세가 뛰어난 월출산 일대는 예로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는데요.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극찬하기도 했어요.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눈이 시리도록 푸른색으로 채색되는 월출산 기슭으로 함께 떠나 볼까요?

 

# 백 년을 지켜온 약속 '다신계', 강진 백운차실

▲ 이한영 생가에서 바라본 월출산

"지난번에 보내준 차와 편지는 도착하였네. (...) 금년 들어 병으로 체증이 심해져서 잔약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것은 오로지 떡차(茶餠) 덕분일세. 이제 곡우 때가 되었으니 다시금 이어서 보내주기 바라네. (...) 모름지기 세 번 찌고 세 번 말려 아주 곱게 빻아야 할 걸세. 반드시 돌샘물로 고루 반죽해서 진흙처럼 짓이겨 작은 떡으로 찍어낸 뒤라야 찰져서 먹을 수가 있다네."

 

다산 정약용은 1830년 3월 15일 강진에 사는 이시헌에게 차를 청하는 편지를 보내요. 강진 유배에서 벗어나 남양주에 머물고 있던 다산이 세 번 쪄서 세 번 말리는 제다법인 삼증삼쇄(三蒸三曬)를 주문한 것이죠. 다산에게 차는 그냥 음료가 아니었습니다. 한약재 만드는 방식을 응용해서 만든 떡차를 주로 마셨어요. 다산의 차에 대한 지식이 강진에서 제다기술로 실용화되었답니다.

 

1801년 강진에 유배를 온 다산은 제자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차도 마셨어요. 18년 후 해배 돼 강진을 떠나게 된 다산에게 제자들은 '다신계(茶信契)'라는 약속을 한답니다. 봄이 오면 1년간 공부한 글과 직접 만든 차를 스승인 다산에게 보내겠다는 약속이었죠. 제자 중 한 명인 이시헌은 해마다 차를 만들어 스승에게 보냈어요. 다산이 죽은 뒤에도 이시헌과 그 후손은 무려 100년 넘게 다산가에 차를 보내며 대를 이어 약속을 지킵니다.

 

다산과 이시헌은 월출산 옥판봉 아래 백운동 정원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어요. 다산에게서 차 만드는 법을 배운 이시헌은 이흠에게, 이흠은 이한영에게 차 제조법을 전수했어요.

 

▲ 이한영 생가의 사랑채. 우리나라 최초의 상품 판매용 녹차가 제작, 포장, 판매되던 곳

다산에 의해 완성된 차 만드는 기술은 이렇게 다신계를 통해 강진에서 지속됐어요. 다신계는 찻잎 채취와 제다의 공동생산, 차밭 관리와 제다법의 표준화로 우리 근현대 차산업의 단초를 마련했어요. 다신계 결성 이후 강진에서 차의 생산과 판매가 분리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차산업이 시작된 것입니다.

 

다신계를 이어오던 이한영은 일제강점기를 맞았어요. 그는 일본이 조선에서 차나무를 기르고 이를 수확해 일본식 이름을 붙여 유통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겼어요. 우리 땅에서, 우리 백성의 노동력으로 탄생한 차가 일본 이름을 달고 수출되다니 당치 않은 일이었죠. 그는 연구 끝에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선보였어요. 강진 백운동과 월출산 옥판봉을 섞어 지은 이름이에요. 다산의 차 재배 기술과 제다법이 고스란히 담긴 백운옥판차는 상업화된 한국 최초의 차 상표였답니다.

 

▲ 백운차실 이한영차문화원

이한영의 대를 잇고 있는 사람은 현재 백운차실 이한영차문화원 이현정 원장입니다. 이 원장은 이한영의 고손녀에요. 그는 당초 차와 거리를 두고 살았어요. 어려서부터 차를 자주 접했을 뿐 고등학교 때 도회지로 나가 살면서 차 생활도 멀어졌죠.

 

대학 졸업 후 13년 동안 중학교와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있던 때였어요. 지인 소개로 강진녹차를 접했는데, 강진에 다산으로부터 전해지는 차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 줄기가 자신의 고조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묘한 흥분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 원장은 차에 대한 공부를 따로 하고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강진 백운옥판차 고찰」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내친김에 「한국 전통 제다법에 대한 융복합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까지 받았어요.

 

그는 2018년 태어난 월출산 자락으로 돌아와 농업회사법인 (주)이한영생가를 설립했어요. 집안 대대로 전해진 '백운옥판차', '금릉월산차', '월산차' 브랜드를 활용한 상품을 디자인했죠. 백운옥판차는 덖음차를, 금릉월산차와 월산차는 발효차와 떡차를 포장하는 상표에요. 차를 만들고 교육을 할 수 있는 공간도 확보했는데요. 바로 백운차실 이한영차문화원입니다.

 

▲ 이한영 생가의 안채. 이한영 선생이 기거했던 곳
▲ 이한영 생가의 안채 툇마루에서 바라본 월출산

백운차실은 지금도 월출산 아래 울창한 대숲 야생차밭에서 대나무 이슬을 맞고 자란 찻잎을 따 차를 만들어요. 이 원장은 차가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문화라고 말해요. 차를 제작하는 사람들은 '마신다'라는 표현보다는 '차를 한다'라는 말을 쓰는데, 차를 마시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문화가 깃든다고 믿기 때문이죠.

 

이한영 선생의 생가 툇마루에 앉아 월출산을 바라봅니다. 산바람이 시원하고 평온한 분위기에 마음이 차분해져요. 차를 즐겨 마신 자신의 취향을 '다산(茶山)'이라는 호로 드러낸 정약용도 선명한 쉼표 하나가 필요한 날이면 이렇게 차 한 잔을 즐겼을 것입니다.

 

# 초록 물결이 밀려드는 차밭 산책, 강진 설록다원

▲ 월출산 아래 펼쳐진 차밭

백운차실이 자리한 월남마을은 이름이 '월남(月南)'이니 '달의 남쪽'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월출산 산맥을 내려다보면 남동쪽으로 고개를 숙인 그믐달 모양입니다. 움푹 들어간 달의 남쪽 자리에 월남마을이 있어요.

 

월남마을에서 월출산 방면으로 조금 더 들어서면 월출산국립공원 경포탐방지원센터 입구가 나와요.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굽은 언덕길을 넘어서면, 월출산 남쪽 기슭으로 난데없이 초록 물결이 밀려드는 차밭이 펼쳐집니다.

 

예로부터 '남한의 금강산'으로 불린 월출산은 차 재배지로도 유명했어요. 월출산은 일교차가 크고 햇빛을 막아주는 맑은 안개가 종종 끼어 야생 차나무가 자라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답니다. 지금도 산자락의 대나무숲 곳곳에서 야생차가 자라요. 이곳에서 나는 차는 떫은맛이 적고 향이 좋아요.

한국 차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백운차실 이현정 원장은 좋은 차가 나는 월출산, 불교, 고려청자라는 차 문화의 삼박자를 갖춘 곳이 바로 강진이었다고 일러줍니다. 고려 시대에는 월출산 야생 차나무 숲을 중심으로 차 문화가 꽃을 피웠어요.

 

조선시대 들어 고려의 차 문화는 쇠퇴했지만 조선 후기 이곳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 선생에 의해 그 가치와 제다법이 재발견되며 부흥기를 맞아요. 다산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 맛이 좋아 자주 즐겼는데요. 다산이 강진으로 오고 차 이야기는 더 깊어진 셈입니다.

 

녹차하면 제주와 보성이 먼저 떠오르지만 강진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다원이 있어요. 1982년 조성된 월출산 아래의 강진다원은 10여만 평 규모입니다. 지금은 오설록이 설록다원이라는 이름으로 가꾸고 있죠.

 

월출산 발치 아래로 흘러내리듯 광활하게 펼쳐진 차밭 풍경은 무심한 발걸음을 절로 멈춰 세울 만큼 아름다워요. 뒤돌아보면 월출산의 뾰족한 암봉과 싱그러운 초록이 가득한 차밭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오히려 비현실적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아요

 

▲ 강진 설록다원 전경

차밭 중간중간에 선풍기처럼 생긴 것은 설록방상팬인데요. 상층부의 따뜻한 공기와 지상의 차가운 공기를 섞어주어 녹차의 어린 새순이 서리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요. 보성이나 제주의 차밭과 달리 정갈하게 가꾸어진 차밭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경관을 즐기며 호젓하게 차밭을 가로질러 산책했어요.

 

# 200년 전통 강진 백운차실 방문 팁

▲ 백운차실의 한상차림

백운차실에서는 창 너머에 월출산과 하늘이 보이는 한옥 차실에서 프라이빗하게 찻자리(한상차림 2인, 39,000원)를 즐길 수 있어요.

 

또 200년의 향기가 담긴 우리나라 최초의 차 브랜드 '백운옥판차'(모차 10,000원, 기차 8,000원)를 비롯해 생엽을 떡처럼 찧어서 엽전형태로 만든 우리나라 전통 완전발효차 '월산떡차'(7,000원)와 월산홍차에 매혹적인 금목서 꽃을 블렌딩해 별처럼 반짝이는 차향을 담아낸 계절차 '금목서홍차'(8,000원) 등 오랜 역사와 진한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전통차를 오로지 백운차실에서 맛볼 수 있어요.

 

이 밖에도 여름 인기 메뉴인 말차팥빙수(9,000원), 강진의 특산물 제철 딸기와 말차의 씁쓸하면서 깊은 감미가 어우러진 생딸기 말차라떼(8,500원) 등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녹차 음료도 즐길 수 있습니다.

 

백운차실 / 이한영문화원

• 주소 :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107

• 영업 시간 : 화 - 일요일 10:30 ~ 18:30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문의 : 0507-1345-4995

 

설록다원 강진

• 주소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1209-1

 

월출산차밭 / 오설록 월출산 다원

• 주소 : 전남 강진군 성전면 백운로 93-25

• 문의 : 061-432-5500

 

▲ 월출산 기슭의 차밭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를 관통하는 웰니스 트렌드와 맞물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말차가 단순한 음료를 넘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 되었어요. 말차 라떼와 빙수는 물론 케이크와 아이스크림까지 말차를 활용한 음료와 디저트가 크게 유행하고 있죠. 바쁜 일상생활 속 어느 날 선명한 쉼표 하나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윽한 차 향기에 취하며 녹찻잎을 따보는 이색체험까지 할 수 있는 원조 말차의 고장, 강진 월출산 차밭으로 떠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