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토타입(prototype)이라는 말은 보통 ‘처음 만든 원형’이나 ‘시험 단계의 모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옥승철이 말하는 프로토타입은 조금 다릅니다. 지금 우리는 원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사진, 영상, SNS 속 이미지들은 순식간에 복제되고, 또 변형되고, 다시 유통되면서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 과정 속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워집니다.
옥승철은 바로 이 지점을 포착합니다. 그에게 프로토타입은 하나의 원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흘러가는 이미지의 상태 자체를 가리킵니다. 원본의 의미가 흐려진 시대에, 예술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합니다. SNS 속 프로필 사진, 광고 속 얼굴, 스크롤 할 때 스쳐 지나간 영상의 장면들. 그것들은 어느새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자리 잡고, 때로는 원본이 무엇이었는지도 잊게 만듭니다.
옥승철은 이 흐릿해진 경계를 예술로 붙잡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얼굴이지만 얼굴 같지 않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화면들. 그 앞에서 저는 ‘원본’이라는 개념이 무너진 시대를 실감했습니다. 이제, 세 개의 전시실로 나뉜 공간 속에서 옥승철이 어떻게 이 질문을 풀어내고 있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 [옥승철 : PROTOTYPE]
[원본 없는 시대의 예술]라
📌옥승철 개인전
• 위치 : 롯데뮤지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7층)
• 관람시간 : 매일 10:30 ~ 19:00 (입장마감 18:30)
• 기간 : 2025.08.15 ~ 10.26 월 1회 휴관
회화, 입체 신작 포함 80여점의 대규모 전시
• 소요시간 : 약 1시간 내외
• 입장료 : 성인 20,000원 / 청소년,어린이 13,000원
• 도슨트 : 하루 3회 도슨트 투어 있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초록빛 네온이 감싸는 복도였습니다. 이 복도는 단순히 공간을 연결하는 길이 아니라, ‘통로’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습니다. 총 세 개의 전시실을 오가려면 반드시 이 네온 복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일종의 게이트웨이처럼, 통로를 지날 때마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 안으로 접속하는듯 했습니다.
# PROTOTYPE 1
[원본 없는 초상]
첫 번째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작품은 세 개의 얼굴상과 커다란 거울이 보여요. 거울 표면에는 격자무늬가 스티커로 얹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3D 프로그램을 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기본값 화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현실이라기보다, 디지털 세계 속에서 이제 막 무언가를 불러오기 직전의 초기 세팅 같은 풍경이었습니다.
작가는 이 장치를 전시의 출발점으로 삼은 듯했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이미지는 단 한 번의 고정된 형태로 남지 않습니다. 한 번 생성된 이미지는 끊임없이 복제되고, 다른 맥락 속에서 변형되며, 또 다른 공간에서 유통됩니다. 결국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원본’이라기보다, 흔적에 가깝습니다.
세 개의 입체 얼굴상과 거울은 바로 그 지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표정도 감정도 배제된 얼굴은 하나의 껍질, 즉 ‘스킨(skin)’처럼 존재했습니다. 언제든 다른 형식으로 갈아 끼울 수 있고, 다른 버전으로 대체될 수 있는 얼굴. 그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앞에서, 저는 오늘날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교체되고, 또 얼마나 쉽게 소비되는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특히 위 작품이 인상 깊었는데요. 증명사진이나 초상화는 원래 한 사람의 정체성과 고유한 특징을 보여주기 위한 장르였습니다. 하지만 옥승철의 작품 속 얼굴들은 조금 달랐습니다.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지 않고, 마치 언제든 다른 모습으로 바뀔 수 있는 패턴처럼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 의도는 전시장에 설치된 거울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거울은 관람자의 얼굴을 단순히 반사하는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복제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거울 속에서 같은 얼굴이 이어지고, 반복되며, 심지어 약간씩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날 때, ‘원본’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복제된 이미지들의 연쇄’가 대신합니다.
# PROTOTYPE 2
[비활성화된 전장에서 마주한 초상]
두번째 전시실은 한층 더 무겁고 낯선 공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얼굴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 속엔 충돌도, 감정도 없었습니다. 마치 정지된 전장처럼, 언제라도 싸움이 벌어질 것 같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이 정적이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만들어냈습니다.
작품을 가까이 다가가 보니, 표면은 유난히 매끈했습니다. 붓질의 흔적이나 재료의 질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옥승철은 디지털 이미지의 반복, 조합, 필터링 과정을 거쳐 만든 이미지를 회화로 옮기는데, 그 과정에서 우연의 흔적을 지워내고, 오히려 디지털의 차갑고 정밀한 평면성을 그대로 물리적 화면에 구현한다고 합니다. 선명한 경계와 선은 마스킹 기법으로 구획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얼굴은 더 이상 감정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복제 가능한 껍데기’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네트워크 환경과 겹쳐 보였습니다. 온라인에서 무수히 복제되고 변형되는 초상들, 필터를 거치고, 편집되고, 다시 조합되는 이미지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고유한 ‘얼굴’을 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단지 끊임없이 바뀌는 데이터의 겉모습을 스쳐보고 있는 걸까요.
움직이지 않는 회화의 화면 앞에서, 제 시선은 자꾸 흔들렸습니다. 관객이 어디에 서느냐에 따라 얼굴들은 마주 보는 듯하다가도, 곧바로 무력화되어 공허한 껍질처럼 변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공간은 실제로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 ‘비활성화된 전장’이자, 디지털 이미지가 지닌 무기력과 폭력성을 동시에 비유하는 장소라는 것을요.
# PROTOTYPE 3
[반복 속 사라지는 감정들]
세 번째 전시실에서 마주한 작품들은 단순히 여러 얼굴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어요. 작가는 “무엇을 보여줄까?”가 아니라, “끝내 무엇이 남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벽면 가득 걸린 얼굴들은 비슷한 구도를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이 조금씩 다르고, 머리카락이 달라지고, 눈빛의 방향도 달라져 있었어요. 처음엔 같은 얼굴처럼 보였지만, 오래 볼수록 미묘하게 달라진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익숙한 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기억하는 방식이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조금씩 변해버리듯, 작품 속 얼굴들은 결코 하나로 합쳐질 수 없었습니다. 작가가 말하듯, 감정도 데이터처럼 저장되고 다시 불려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통제를 반복 복용하면 내성이 생기듯, 같은 이미지와 감정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반응은 점점 흐려지고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떤 감정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실은 매번 호출되는 순간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작품들은 이상하게도, 불쾌한 표정 외에도 오래 바라볼수록 묘하게 낯설고 불편한 기분이 듭니다. 마치 우리가 매일 휴대폰 화면 속에서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진과 영상처럼요. 익숙함이 쌓일수록 오히려 더 낯설게 다가오는 경험이었습니다. 작가는 이런 얼굴들을 통해, 우리가 매일 보는 이미지들이 단순히 개인적인 기억이 아니라 사실은 사회와 역사, 대중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주입된 기억’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 공간은 결국 질문을 던집니다. 예술에서 늘 중요하게 여겨져 왔던 독창성이나 진정성 같은 가치들은, 이미지가 무한히 복제되고 소비되는 지금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과연 여전히 의미가 있는 걸까? 작가는 단정적인 답을 내리기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을 통해 그 물음을 관객 스스로 느끼게 합니다. [옥승철 : PROTOTYPE] 전시는, 디지털 시대에 ‘원본’과 ‘복제’라는 오래된 개념이 어떻게 뒤집히는지를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공간이었습니다.
사진이나 글로는 다 전해지지 않는 감각이 분명 있습니다. 초록빛 네온 복도를 지나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오가는 경험, 그리고 수십 개의 작품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은 전시장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어요. 혹시 “요즘 전시가 다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가진 분이라면, 이 전시를 꼭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원본이 없는 시대, 예술이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 그 질문을 직접 마주하는 경험은 분명 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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