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시절부터 전주 한옥마을은 제게 늘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 리스트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녀온 친구들의 SNS를 보면 화사한 한복을 차려입고 옛 거리를 거니는 모습이나, 먹음직스러운 길거리 음식을 양손 가득 들고 찍은 인증샷들이 항상 부러웠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미디어와 SNS에서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굳이 내가 직접 가지 않아도 이미 다 아는 곳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냥 예쁜 한옥 몇 채 있고 길거리 음식 파는 게 전부 아닐까?' 하는 얕은 편견도 조금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6월, 드디어 기회가 닿아 훌쩍 떠나게 된 전주는 제 예상을 기분 좋게 빗나갔습니다. 미디어 속 단편적인 이미지로만 알던 전주와, 직접 두 발로 걷고 냄새를 맡으며 체험한 전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단순히 옛 풍경을 보존해 놓은 세트장이 아니라,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체험의 장이었죠. 이번 글에서는 그 특별했던 전주의 하루와 다음 날까지 이어진 전주의 맛을 천천히 소개해보려 합니다.
# 전주의 전통 있는 옛스러움, 전주 한옥마을
📌 전주 한옥마을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기린대로 99
운영시간 : 상시 개방
입장료 : 무료



전주 한옥마을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껴진 건 압도적인 규모와 활기였습니다. 줄지어 펼쳐진 까만 기와지붕이 생각보다 더 신선하게 다가왔는데요. 한옥마을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거리 전체가 옛스러운 분위기를 제대로 풍기고 있었고, 주말을 맞아 찾아온 사람들로 거리는 꽤 북적였습니다.
입구부터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한복 대여점들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저도 도착하자마자 가장 화려한 한복을 골라 입고 거리를 누볐겠지만, 6월의 더운 날씨에 조금 지치기도 했고 쑥스럽기도 해서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입은 모습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죠. 그런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단순히 예쁘기만 한 한복이 아니라, 일행끼리 콩쥐 팥쥐, 돌쇠와 마님, 점잖은 대감 양반 등 유쾌하게 콘셉트를 맞춰 입은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아, 내가 진짜 전주 한옥마을에 오긴 왔구나’ 하고 실감이 났습니다.

햇빛을 받으며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송글송글 맺혔는데, 길 한쪽으로 졸졸 흐르는 얕은 물길이 보였습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 보여서 바라보고 있는데, 주변에 있던 꼬마들이 아예 신발을 벗어 들고 맨발로 그 물길을 따라 첨벙첨벙 걷고 있었죠. 평범한 아스팔트나 보도블록 대신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그 해맑은 모습이 내심 부러워, 저도 모르게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조금 출출해져서 한옥마을의 명물이라는 오징어 튀김을 먹으러 갔습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이미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죠. 오징어 한 마리를 머리부터 다리까지 통째로 튀겨낸 뒤 매콤달콤한 시즈닝을 버무려 꼬치에 꽂아주는 음식이었는데, 태어나서 처음 보는 비주얼이었습니다. 가격은 15,000원으로 길거리 음식치고는 솔직히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짭짤하고 바삭한 맛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맛있어서, 다음에 전주에 오면 다시 줄을 서서라도 또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맛있는 꼬치를 들고 기분 좋게 걷다 보니 길거리에 '전주국가유산야행'이라고 적힌 플래카드와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전주의 국가유산을 테마로 한옥마을 거리 곳곳에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열린다고 하더라고요.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추게 한 건, 선비 복장을 한 스태프들이 길 위에 판을 펼치고 사람들과 빙고 게임을 진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전주의 유산을 주제로 한 빙고였는데, 주로 어린이 관람객들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진지하게 빙고판을 들여다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과, 능청스럽게 진행하는 선비 스태프들의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고, 축제 기간에 맞춰 온 게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야행 행사가 시작된 오후 6시가 지나자, 경기전도 행사 동선에 맞춰 무료로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서니 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을 귀여운 캐리커처로 그려놓은 조형물들이 반겨주었죠. 그 맞은편에는 여러 작가님들이 저마다의 특색 있는 화풍으로 관람객들의 얼굴을 '어진' 형태로 그려주는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한 장 남기고 싶어 기웃거렸지만, 인기가 워낙 많아 예약이 이미 꽉 차 있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니 태조 이성계의 실제 어진이 모셔진 공간이 나왔습니다. 아쉽게도 보수 공사 중이라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는 없었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특유의 근엄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전해졌죠. 문득 '왜 하필 전주에 어진이 있을까?' 궁금해져 자료를 찾아보니, 태조 이성계의 본관이 바로 '전주'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여행을 오니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도 하게 되는 것 같아 왠지 뿌듯했습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담장 너머에서 피리, 가야금, 대금 소리가 어우러진 전통 국악 연주가 들려왔습니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한복을 입은 악사님들이 버스킹을 하듯 연주를 하고 계셨죠. 평소에는 일부러 찾아 듣지 않는 전통음악인데, 기와지붕과 돌담이 있는 옛스러운 풍경 속에서 들으니 그 선율에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한참을 서서 음악을 감상하게 됐습니다.



경기전 중심부 쪽에는 볼거리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사랑방에서 전통차를 마시는 체험, 전통 떡 만들기, 모래밭에 숨겨진 유물 찾기 체험 등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꽉 차 있었죠. 시간만 여유로웠다면 하나씩 다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특히 귀여웠던 건 '유물 찾기 체험'을 하는 아이들이었는데, 고사리 같은 손에 플라스틱 장난감 삽을 쥐고, 이마에는 헤드랜턴까지 야무지게 낀 꼬마 고고학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 흙을 파내는 모습은 절로 카메라를 들게 만들었습니다.

경기전 안쪽 관람을 마치고 산책 겸 외곽 둘레길 쪽으로 향했습니다. 중심부에서 멀어지니 조용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담장 너머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죠. 깜짝 놀라 다가가 보니 '좀비실록'이라는 프로그램 부스가 있었습니다. 관계자분께 여쭤보니, 어두컴컴한 곳에서 좀비를 피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내는 방탈출 스타일의 추리 모험 코스라고 했습니다. 입구부터 으스스하게 꾸며져 있어 호기심이 확 생겼지만, 이 역시 100% 사전 예약제라 체험할 수 없었습니다. 안에서 흠칫흠칫 놀라며 소리치는 참가자들의 비명을 들으니 저도 꼭 해보고 싶어져서, 다음 전주 여행 때는 무조건 1순위로 예약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조명이 켜진 예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어진박물관'이 나왔습니다. 아까 멀리서 봤던 태조의 어진뿐만 아니라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의 어진이 쫙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신기했던 건, 우리가 지폐나 책에서 봐서 익숙한 세종대왕의 어진이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내문에 따르면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실제 용안은 알 수 없고, 현재의 어진은 김기창 화백이 상상력을 더해 그린 추정 상상도라고 하는데요. 그동안 진짜 얼굴인 줄 알았는데,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박물관 밖으로 나오니 공터 곳곳에서 재미있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사극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은 복장을 한 '이야기꾼'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역사 해설을 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전주가 옛 후백제의 수도였던 점을 살려, 후백제 왕 '견훤'으로 분장한 해설사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교과서처럼 딱딱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이 겪은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듯 1인칭 시점으로 연기하며 역사를 풀어내고 있었죠. 뻔하게 느껴질 수 있는 역사 이야기도 이렇게 연극처럼 들려주니 사람들이 홀린 듯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기획이 참 좋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한옥마을 거리 끝 쪽으로 가니 이번엔 쩌렁쩌렁한 창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판소리 '흥보가' 단막창극이었는데요. 창극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소리꾼의 시원시원한 발성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전통 공연이라 지루할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죠. 구경만 하려다 푹 빠져 끝까지 보게 됐는데, 소리꾼이 중간중간 무대 앞 관객들에게 말을 걸고 즉석에서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습이 마치 현대의 코미디 쇼나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유쾌했습니다.

창극이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데, 바로 그 모래판에서 씨름 대회가 이어진다고 해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전문 선수가 아니라 사전 예약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회였죠. 심판까지 제대로 갖춰진 정식 씨름 경기를 눈앞에서 보는 건 초등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었습니다. TV 명절 프로그램으로 볼 때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직관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탐색전이 길지 않고 샅바를 잡고 일어서자마자 순식간에 기술이 들어가며 한 판 승부가 났죠. 체격이 큰 상대를 기술로 시원하게 모래판에 뒤집는 통쾌한 장면을 보니, 보는 제 스트레스까지 날아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씨름이 이렇게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스포츠인지 전주에 와서 처음 알게 됐습니다.
# 전주의 소울푸드, 콩나물국밥
📌 현대옥 전주본점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화산천변2길 7-4
운영시간 : 매일 24시간
메인 메뉴 : 콩나물국밥 9,000원 / 오징어 사리 3,500원

한옥마을을 다녀온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전주 미식의 상징인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나섰습니다. 워낙 유명한 메뉴라 식당이 많았지만, 기왕 전주에 온 만큼 '현대옥 전주본점'으로 향했죠. 서울에도 현대옥 체인점이 많지만, 사람들이 입을 모아 "전주 본점은 확연히 다르다"고 하길래 꼭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점심 피크타임을 살짝 넘긴 애매한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본점 건물의 웅장한 규모에 한 번 놀라고 그 넓은 주차장에 차가 가득찬 모습에 두 번 놀랐습니다. 식당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고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죠. 딱 점심시간에 맞춰 왔다면 무조건 웨이팅을 했겠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자리를 잡고 콩나물국밥에 '오징어 사리'를 추가로 주문했습니다. 메뉴판에 대왕오징어나 가공품이 아닌 '진짜 오징어'만 쓴다고 적혀 있었는데, 실제로 나온 사리를 보니 살이 통통하고 실한 게 한눈에 보였습니다. 사리 추가가 3,000원이라 국밥 가격에 비해 조금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국물의 식감과 감칠맛을 확 올려주니 전주에 간다면 꼭 추가해서 먹기보길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본격적으로 국밥을 먹기 전에, 따로 작은 그릇에 담겨 나온 '수란'부터 맛봤습니다. 수란에 뜨거운 국물을 몇 숟가락 넣고, 통통한 오징어 사리와 짭짤한 조미김을 부숴 넣은 다음 훌훌 마시듯 먹으면 빈속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에피타이저로 제격이었죠. 흥미로웠던 건 전주 콩나물국밥도 남부식과 북부식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남부식은 수란이 따로 나와 국물을 끝까지 맑게 먹을 수 있고, 북부식은 뚝배기 안에 계란이 들어가 조금 더 걸쭉하게 먹는 스타일이라고 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수란이 전채요리처럼 따로 나오는 남부식이 훨씬 깔끔하고 취향에 맞았습니다. 수란으로 속을 달랜 뒤 드디어 국밥 국물을 한 입 떠먹었는데, 사람들이 왜 본점은 다르다고 말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습니다. 미식가나 요리 전문가가 아니라서 어떤 재료 때문에 맛이 다른지 정확히 분석할 수는 없지만, 서울에서 먹던 맛보다 훨씬 깊고 개운하면서도 끝맛이 엄청 시원하고 깔끔했습니다. 평소 국밥 한 그릇을 다 비워도 묘하게 2% 허전할 때가 있었는데, 이곳의 국밥은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속이 꽉 차는 든든함이 있었죠.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으며 "전주에 오면 여긴 무조건 재방문이다"라고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 전라도의 제빵 자부심, 온심당 베이커리
📌 온심당 베이커리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화산천변2길 3-5
운영시간 : 매일 08:00 ~ 21:30
대표 메뉴 : 콩나물빵 2,800원 / 식혜빵 2,800원



뜨끈한 국밥을 든든하게 먹고 나니 시원한 커피와 달콤한 빵이 당겼습니다. 현대옥 근처에 인기 제빵 서바이벌 프로그램 '천하제빵'에서 전라도 지역 대표로 주목받은 파티시에님가 운영하는 '온심당 베이커리'가 있다는 걸 미리 찾아두었기에 바로 이동했습니다. 매장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버터 향이 확 풍겼습니다. 방송에서 유명해진 '콩나물빵'과 '식혜빵' 세트부터 잼, 쿠키, 다양한 페이스트리까지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쇼케이스를 꽉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많은 종류를 매일 어떻게 다 만드시지?' 싶을 정도로 종류가 다양해 뭘 고를지 한참 고민했죠. 결국 저는 초코 코팅이 듬뿍 덮인 '초코 소라빵'과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골랐습니다. 자리에 앉아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는데, 겉면의 진한 초코 코팅은 물론 빵 속에 초코우유처럼 부드러운 크림이 빈틈없이 꽉 차 있었습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부드러운 크림이 넉넉하게 느껴졌고, 맛도 무척 훌륭했습니다. 산미 있는 커피와 달콤한 초코빵의 조합은 국밥 직후의 디저트로 더할 나위 없었죠. 2층에는 파티시에가 직접 빵을 만드는 작업 공간이 있는 듯했습니다. 슬쩍 올라가서 구경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괜히 기웃거리다가 작업에 방해가 될까 봐 얌전히 1층에만 머물렀는데요. 다른 손님들도 다들 저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1층에서 조용히 빵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재밌었던 건, 매장에 앉아 있다 보니 아까 현대옥에서 제 주변 테이블에 앉아 국밥을 먹던 손님들이 하나둘씩 빵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현대옥 전주본점 → 온심당 베이커리'로 이어지는 코스가 전주 여행객들 사이에서는 알게 모르게 정식 코스로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 맛거리가 되는 밤거리, 전주 남부시장 야시장
📌 전주 남부시장 야시장
위치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1길 19-3 남부시장
운영시간 : 매주 금·토요일17:00~23:00


전주에서의 마지막 저녁은 한옥마을만큼이나 여행객들에게 필수 코스로 꼽히는 '남부시장 야시장'에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야시장 안 먹거리 골목에 들어서니, 평화로웠던 낮의 전주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인파와 열기가 뿜어져 나왔습니다. 인기 있는 매대 앞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기본일 정도로 북적였습니다. 저는 작정하고 최대한 많이 먹어보기로 했고 그 중 4가지 메뉴를 도장 깨기 하듯 맛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철판 위에서 볶아내는 '야채말이'입니다. 수북하게 쌓인 양배추와 숙주 등의 채소를 얇은 대패삼겹살로 돌돌 말아 철판에서 매콤달콤한 소스를 발라 굽는 음식이었는데요. 고기의 육향과 불향에 채소의 아삭함이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습니다. 생각보다 양도 은근히 많아서 걷느라 지쳤던 초저녁의 허기를 빠르게 달래주기 딱 좋았습니다.

두 번째는 줄이 꽤 길었던 '제주 흑돼지 소시지'입니다. 제주 흑돼지로 직접 만든 수제 소시지라고 하는데요. 사장님이 거대한 토치로 화려하게 불쇼를 하며 구워주셔서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찍고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사장님 입담도 무척 유쾌하셔서, "맛없으면 100% 환불해 드립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죠. 갓 구워진 소시지를 한 입 깨무는 순간, 톡 터지는 껍질 안으로 고소한 육즙이 줄줄 흐르며 진한 고기 맛이 입안을 채웠습니다. 사장님의 넘치는 자신감이 어디서 나왔는지 바로 납득 가는 맛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소시지집 사장님이 "우리 집만큼 맛있다"며 슬쩍 추천해 주신 건너편의 '타코' 집입니다. 앞서 먹은 것들로 이미 배가 조금 차서 맛만 볼 생각으로 1개만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양이 푸짐했고, 맛도 웬만한 타코 전문점 못지않았습니다. 길거리 음식 특성상 향신료가 너무 강하면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이곳은 향신료 맛이 적당히 중화되어 있어 직화 불고기와 싱싱한 토마토, 양상추가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졌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도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메뉴는 달콤하고 시원한 '철판 아이스크림' 입니다. 덥기도 하고 기름진 음식들을 연달아 먹었더니 상큼한 디저트가 당겨서 '딸기 바나나' 맛으로 주문했습니다. 영하로 얼어붙은 철판 위에 우유를 붓고 진짜 딸기와 바나나를 스패튤러로 '탁탁탁' 잘게 다지며 섞는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보았는데, 액체였던 재료가 점점 얼면서 쫀득한 아이스크림 롤로 말려 나오는 과정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맛 자체는 우리가 아는 맛있는 과일 아이스크림 맛이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으로 구경하는 보는 재미와 백색소음 같은 다지기 소리를 듣는 재미가 확실해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직접 다녀와 본 전주는 그저 한옥으로 꾸며진 짧은 거리일 것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깨주었습니다. 맛있는 먹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게 풀어낸 볼거리, 직접 땀 흘리고 참여할 수 있는 즐길 거리가 가득했으니까요. 운 좋게 전주국가유산야행 행사 기간에 맞춰 간 덕분에 더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부족하거나 예약을 못 해서 아쉽게 돌아서야 했던 체험들은 다음 전주 여행의 to do list에 고정 시켜놓고 아쉬움을 뒤로 했습니다.
돌아보면 이번 전주 여행은 제게 ‘처음’이 많았던 여행이었습니다. 처음 본 창극, 처음 가까이서 본 시민 씨름, 처음 알게 된 어진 이야기, 처음 먹어본 오징어 튀김과 철판 아이스크림, 그리고 현대옥 전주본점에서 다시 느낀 콩나물국밥의 맛까지.
여행은 단순히 사진을 남기러 가는 게 아니라, 제 평범한 일상에서는 해볼 수 없는 경험을 통해 굳어 있던 감각을 깨우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몰랐던 걸 알게 되고, 생각해본 적 없던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익숙하다고 여겼던 맛에서도 다른 차이를 느끼게 되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제 머릿속 세계가 한 뼘씩 더 넓어지는 기분이 듭니다. 전주는 한옥으로만 기억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었고, 기대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었으며 보는 재미와 먹는 재미가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였습니다. 전주는 제 섣부른 편견을 기준 좋게 깨준 신선하고 재미있는 여행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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