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

“합시다, 러브” 폭포·정자·계곡을 품은 안동 만휴정의 외나무다리 (feat. 미스터 션샤인)

안동 만휴정은 영남 지역의 대표적인 누정이에요. 송암폭포 물줄기 위로 삐죽이 보이는 만휴정은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닌데요. 1500년 연산군 시절 세워진 정자 한 채가 주변 계곡, 폭포, 원시림과 어우러진 경관 전체로 확장되어 2011년 국가 명승으로 지정됐습니다. 건물 하나가 아닌 자연 속의 한 장면 전체가 문화재가 된 셈이죠. 만휴정은 김계행이 70세의 나이에 낙향하여 지은 정자로, 이름 그대로 ‘인생 늘그막에 쉬어 가는 정자’라는 의미가 그대로 느껴져요.

 

# 500년 전 청백리가 지은 계곡 원림

만휴정 원림으로 다가서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품었습니다. 선계로 오르는 승선의 느낌을 안겨요. 길 양쪽에서 이어지는 산이 단아해요. 나직하게 눌러앉은 산에는 제법 송림이 우거졌어요.

 

햇빛이 짙어 질수록 숲은 더 깊어집니다. 능선을 타고 내려온 바람이 계곡을 건너며 서늘한 기운을 실어 날라요. 낌새 채지 못했는데 어느새 고도는 고개 하나를 넘었습니다.

 

이윽고 산길이 세차게 솟아오른다 싶더니 높은 암벽을 탄 채 날 듯이 하얀 포말의 물길이 쏟아져요. 폭포 위로 산속 정자 풍경이 엿보입니다.

 

오래된 폭포 소리와 함께 고색창연한 만휴정이 조용히 방문객을 맞아요. 울창한 나무 사이로 이어지는 오르막 숲길 끝에서 마주치는 풍경은, 서두르지 않은 걸음에만 허락되는 그런 고요함이에요.

 

경상북도 안동 만휴정(晩休亭)은 조선 성종, 연산군 대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이 나이 70세에 세운 정자예요. 원래 이름은 ‘쌍청헌(雙淸軒)’, 이후 만휴정으로 바뀌었죠.

 

‘만(晩)’은 늦다, ‘휴(休)’는 쉰다는 뜻인데요. ‘만년에 얻은 휴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은거한 그는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다”라는 말을 남겼답니다. 이 정신이 정자 이름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어요.

 

1986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데 이어, 2011년에는 정자와 계곡·폭포·산림을 아우르는 일대 전체가 국가 명승 ‘안동 만휴정 원림’으로 지정되며 그 가치를 공식 인정받았어요.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만휴정 외나무다리 장면

만휴정은 개울 건너서 봐도, 개울 아래에서 봐도, 개울 위에서 봐도 멋스런 모습이에요. 계곡 너머 만휴정에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요. 자연과의 조화를 위해 담양 소쇄원처럼 좁은 다리를 놓았답니다.

 

외나무다리 한쪽은 만휴정 축대, 한쪽은 길 아래 솟은 바위의 한 면을 잇대고 있어요. 여기서 저 유명한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유진초이가 고애신에게 “합시다 러브, 나랑... 나랑 같이”라는 공전의 대사를 날린 곳입니다.

 

예능 ‘나는 솔로’ 16기 역시 이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죠. 화면 속 아름다움이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이에요.

 

# 정면 3칸 누마루에서 내려다보는 계곡 절경

만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규모로,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단아한 자태를 갖추고 있어요. 정자 앞쪽에 열린 누마루가 있어 발아래 계곡을 바라보며 앉기 좋은 구조입니다.

 

만휴정 계곡은 만휴정의 서쪽과 남쪽 방향의 450m 정도의 봉우리 양쪽 산맥에서 흘러내려요. 산봉우리에서 계곡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곳이라 수량이 풍부하답니다.

 

계곡에서 물러나 축대로 높게 단을 쌓아 앉은 만휴정인데요. 등지고 있는 산이 달려와 암괴로 마치는 터에 오붓하게 자리해요. 암괴의 아래쪽은 단층을 지어 건물과 편안하게 마주하나 위쪽은 만휴정을 내려다봐요. 병풍처럼 감싸주는 암괴가 내어준 자리에 만휴정이 앉았습니다.

 

 

누마루에 걸터앉으면 물소리가 귀를 채우고, 맞은편 암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가 시야에 들어와요. 정자 주변에는 짙은 녹음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여름에도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요.

 

수백 년 된 나무들과 계곡의 기암, 흰 포말의 폭포가 한 프레임 안에 어우러지는 이 풍경을 보면 조선의 선비가 왜 이 자리를 택했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답니다. 건물 자체보다 건물이 자리한 방식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공간이에요.

▲‘만휴정’과 ‘쌍청헌’ 편액

‘만휴정’ 편액 너머로 ‘쌍청헌(雙淸軒)’ 편액과 여러 문인들이 만휴정을 노래한 시와 여러 편액들이 남아있습니다. 그 중 김중망의 시 한 수.

 

"외진 곳 물과 산이 좋아

하늘이 만든 이곳 시객이 와보니

맑은 못물은 옥으로 만든 거울 같고

흰 돌은 쌓아 놓은 구슬 같네"

 

# 만휴정 원림의 삼소삼송(三沼三松)

만휴정의 모습은 1790년, 정조 14년 동야 김양근이 지은 「만휴정중수기」에 잘 묘사되어 있어요.

 

"계곡이 시작되는 곳부터 시냇물이 세차게 부딪치고 뿜어 나와 층층으로 폭포를 만들며 세 곳의 깊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 세 번째 가마 있는 곳에 집을 지어 정자를 세웠으니 산과 계곡이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었다."

 

만휴정 원림은 만휴정을 중심으로 세 개의 소로 공간을 나뉘는데요. 만휴정에서 송천 계곡 건너 앞산을 바라보며 우측 너럭바위 ‘청백석’과 그 아래의 ‘칠흑소’, 외나무다리 아래 송암폭포 암반 꼭대기 ‘정천석’에 모인 ‘정소’, 그리고 송암폭포 아래 용의 신령스러움을 지닌 ‘용소’ 공간이 그것이에요. 이른바 삼소(三沼)입니다.

 

여기에 송림(松林), 송천(松川), 송암(松巖)의 삼송(三松)을 더하여 삼소삼송(三沼三松)을 만휴정 원림의 공간 특징으로 삼아요. 귀를 씻으며 경관을 즐길만한 선계입니다.

 

▲너럭바위 ‘청백석’에서 바라본 만휴정 외나무다리

첫 번째 공간인 너럭바위 ‘청백석(淸白石)’은 직접 너럭바위에 기대어 앉거나 서성일 때 그 진가를 만날 수 있어요. ‘만휴정 외나무다리’의 시경이 이 너럭바위에서 탄생했답니다.

 

만휴정을 내려다보면서 좌우의 산맥과 그 사이로 흐르는 계류의 시원함과 쾌활한 소리를 귀한 손님으로 삼아 대접해요. 차도구를 갖춰 여럿이 차를 나누어 마시며 심산유곡을 환담하기에 편한 곳이에요.

 

▲만휴정 외나무다리에 바라본 너럭바위 ‘청백석’과 ‘칠흑소’

김양근은 「만휴정중수기」에서 이곳 너럭바위 공간을 다음처럼 묘사했어요.

 

“상류는 전의곡(全義谷)이 되니, 이 시내의 동쪽으로 아득히 달려가는 것이 굽이굽이 십여 리나 되고, 곧 마당 같은 큰 돌이 있어 산과 시내가 만나는 곳에 언덕이 있는데, 또한 모두 빽빽하게 늘어서 촘촘하게 이어져 흰 담요를 첩첩이 쌓아놓은 것이나 흰 눈을 평평하게 깔아 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물이 그 사이에서 형세를 따라 휘돌아 졸졸 비단과 죽림의 소리를 내는데, 그 근원이 이미 멀고 골짜기가 점차 낮아지면 한 줄기 날아오르는 샘물”이 소를 이룬다고 했어요.

 

이곳이 첫 번째 가마소인 바다 같은 모습의 ‘칠흑소(漆黑沼)’입니다.

 

▲만휴정 외나무다리에 바라본 너럭바위 ‘청백석’과 ‘칠흑소’

두 번째 공간은 만휴정을 배경으로 한 외나무다리 공간이에요. 만휴정의 중심 공간입니다. 만휴정 낮은 담장 너머는 평탄한 계곡의 계원이 전개되요. 이곳 마당같이 펼쳐진 계원의 바닥도 암반이죠.

 

완만한 경사로 물은 태극의 형상으로 휘돌며 흘러서 천천히 흐릅니다. 흐르는 물이 다시 아래쪽 ‘정천석(亭泉石)’ 바위에 부딪히며 작은 소를 만들어요.

 

이곳이 두 번째 가마소인 ‘정소(亭沼)’입니다. 물이 폭포로 나가기 전에 잠시 쉬며 머무는 곳이에요.

▲만휴정 외나무다리에 바라본 너럭바위 ‘청백석’과 ‘칠흑소’

 

세 번째 공간은 송암폭포가 만드는 선계의 영역이에요. ‘정소’에 휘돌며 모였던 물이 꽉 조인 수구(水口)를 통과하면서 근육질 몸매의 수직 절벽 암반으로 쏟아져요.

 

하얀 포말의 물줄기가 커다란 웅덩이를 만듭니다. 이곳 이 세 번째 가마소인 ‘용소(龍沼)’로 선객이 사는 곳이에요.

 

송암폭포는 손대지 않은 기막힌 승경으로 범접할수록 마음을 일깨워 세웁니다. 「만휴정중수기」는 송암폭포의 의경이 폭포를 감상하고자 함이 아니라 귀를 씻기 위함이라고 명백하게 밝혀 놓았어요.

 

“송암에서 폭포를 완상하는 일은 그 뜻이 실로 귀를 씻는 데 있었으니, 어찌 다만 경물을 위한 것이겠는가?”

 

# 화마를 이겨낸 안동 만휴정 방문 팁

▲2025년 3월, 경북 산불 당시 1000도 화마를 버틴 방염천의 기적

만휴정은 지난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군 세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경북 산불 확산으로 한때 소실됐다고 알려졌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하면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어요.

 

3월 25일 산불이 길안면 쪽으로 맹렬하게 뻗어오자 안동시는 이곳에 방재 인력을 투입시켰는데요. 돌풍과 함께 불길이 만휴정 뒤쪽을 덮치자 철수시켰고, 만휴정이 소실됐을 것이란 추정이 제기됐어요.

 

하지만 철수에 앞서 국가유산청과 안동시, 경북북부돌봄센터, 소방서 등 40여명은 합동으로 기와 지붕을 제외한 목조건물 전면을 꼼꼼하게 방염천으로 덮었어요. 덕분에 잔불이 건물에서 불과 5m 떨어진 언덕에서 발견됐을 정도로 아찔한 상황에서도 만휴정은 화마를 피할 수 있답니다.

 

산불로 전소 됐던 만휴정 주변의 아름다운 숲과 계곡도 일년 여가 흐르는 동안 차츰 회복돼 지금은 만휴정 일대가 예전 모습을 빠르게 되찾고 있습니다.

 

만휴정에서 멀지 않은 묵계마을에는 김계행을 배향한 묵계서원과 묵계 종가가 있어요. 묵계서원과 묵계 종가도 예스러운 맛이 있어 같이 다녀올 만하답니다. 「만휴정중수기」을 쓴 김양근의 본관 역시 안동으로 김계행의 후손이에요.

 

📌안동 만휴정 원림

주소: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1127-120

관람시간 : 10:00~16:30 정기휴무 매주 월/화요일)

입장료: 일반 3,000원 / 단체 (20인 이상) 2,000원 / 초등학생 2,000원

주차요금: 무료 (마을 진입 전에만 있음)

문의: 054-805-7333

 

만휴정의 빼어난 경관에서 얻은 감흥을 시경으로 창작한 김양근은 웅장하고 신비로운 폭포와 연못, 기이한 바위와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만휴정의 모습을 한 폭의 그림처럼 묘사했어요. 자연의 경이로움과 그 속에서 한가롭게 풍류를 즐기는 겸손한 은자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잘 나타납니다.

물이 모이는 곳은 절로 가마소를 이루었네 /匯處自成釜, 회처자성부
열 길이나 되는 푸른 바위가 비취 같고 /十丈靑如玉, 십장청여옥
그 속에는 신령스러운 것이 있네. /其中神物有, 기중신물유

폭포와 깊은 연못도 있고 /瀑淵猶或有, 폭연유혹유
가장 볼 만한 것은 너럭바위이다. /盤石最看大, 반석최간대
희끗희끗 다듬어져 있으니 /白白如磨礱, 백백여마롱
백 명은 앉을 수 있겠다. /百人可以坐, 백인가이좌

난간 앞 세 개의 가마소가 둘러 있고 /檻前三釜繞, 함전삼부요
시흥이 날개 돋듯 일어나는 정자이다. /詩興翼然亭, 시흥익연정
문드러져 질펀한 꽃들이 다투어 웃고 /爛漫花爭笑, 난만화쟁소
온산을 계곡물에 모두 담아내는 형국이다. /一山盡蘸形, 일산진함형

- 김양근, 「만휴정즉」, 만휴정에 걸려있는 시판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역사문화가 어우러진 만휴정 원림은 한 사람의 청렴한 뜻이 자연 속에 깊이 뿌리내린 공간이에요. 정자에 앉아 폭포 소리를 들으면, 500년이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집니다.

 

드라마 속 한 장면이 궁금해 찾아갔다가 그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돌아오게 되는 곳, 안동 만휴정이 바로 그런 자리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