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의 겨울은 도시의 겨울보다 따뜻하다.’ 예전에 우연히 보았던 일본 광고의 카피입니다. 이 문장이 말하는 건 단순한 기온이 아니라, 사람의 정(情)에 대한 이야기였겠지요. 이번 여행은 그 문장이 떠오르는 도시, 강원도 정선으로 다녀왔습니다. 눈이 대부분 녹아버린 서울과는 달리, 정선에는 여전히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습니다. 기온만 놓고 보면 분명 더 차가운 곳이었지만, 감성만큼은 정선에서의 겨울이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저는 예전에 스키장을 찾기 위해 정선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스키장만 다녀왔을 뿐, 정선이라는 도시가 품고 있던 매력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지를 다시 정선으로 정하게 된 건, SNS에서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만항재였습니다.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자연 풍경, 그리고 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저도 그 새하얀 겨울왕국을 직접 밟아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선에 대해 조금 더 찾아보니, 만항재뿐만 아니라 숨겨진 즐길 거리와 볼거리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중에서도, 만항재를 비롯해 고한 구공탄시장, 그리고 정선 레일바이크에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글로 다루지 않았던 곳들이기도 했기에, 더욱 기대가 컸고, 기대만큼 만족감까지 컸었죠.
추위를 뚫고 하루를 이어가는 시장 상인들의 열정과 온정, 그리고 그 겨울 속에서 함께한 사람과 천천히 쌓아 올린 애정의 순간들까지. 이번 글에서는 그 경험들을 차례로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 해발 1330m의 겨울왕국, 만항재
📌 만항재
• 위치 :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산216-37
• 운영시간 : 24시 상시개방
• 입장료 : 무료
• 주차료 : 무료

대한민국에서 자동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도로라 하면 어디일까요? 바로 해발 1330m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고개, 만항재입니다. 이곳은 겨울이 되면 차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새하얀 겨울왕국이 마법처럼 펼쳐지는 곳인데요. 날씨가 풀려 눈이 조금 녹았지만, 만년설처럼 여전히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만항재 부근에는 야생화 단지인 산상의 화원과 만항재 쉼터가 위치해 있는데, 막상 가보면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느낌보단 마치 하나의 장소로 느껴지곤 합니다. 두 곳 모두 숲길에 새하얗고 풍성한 눈들이 깔려있기 때문인 거겠죠. 만항재 곳곳에 깔려 있는 눈을 보고 있자면, 우리를 겨울로 초대하고 우리의 발걸음을 환영하는 화이트 카펫이 깔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소수의 몇 명만 거닐 수 있는 레드카펫이 아닌, 만인을 환영하는 화이트 카펫. 이렇게 생각해 보면, 겨울이란 계절은 참 온정이 넘치는 계절인 것 같습니다. 만항재에 깔린 눈에 첫 발을 올려 몇 발자국 걷다 보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겨울을 추운 계절로 기억하는 게 아닌 눈의 계절로 기억하던 그때. 산타클로스가 오는 것만큼이나 눈을 기다리고, 눈이 오면 재빠르게 외투와 장갑을 챙겨나가 눈 속에 흠뻑 파묻혀 오던 그때. 그때만큼 눈이 오는 것이 설렜을 때가 없었죠. 만항재의 눈 길에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어렸을 때의 기억들과 감정들이 더 선명해져 왔습니다.

만항재는 눈만큼이나 상고대가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봤던 사진 속에서도 상고대가 지천에 깔려 있었죠.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방문한 때에는 기온 탓인지 사진 속 장면 같은 느낌의 상고대는 볼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날씨가 허락할 때 꼭 상고대까지 보러 다시 와야겠습니다. 만항재의 겨울이 가장 절경인 때를 소개하기 위해 사진은, 인터넷 속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만항재에 들린다면 여러분도 꼭 이와 같은 절경을 경험해 보시기를 바라봅니다.


만항재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정선군과 영월군을 나누는 표지판이 위치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요. 이 두 표지판을 보니, 이곳이 백두대간의 고개라는 말이 여실히 실감이 났습니다. 그리고 마치 제가 직접 걸어서 넘어가는 느낌까지 들었고요. 실상은 코앞까지 차로 와서 넘어가는 것이면서도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두 지역의 경계에 제 발이 닿아있는 경험이 아마도 생소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 탄광에서 전통시장으로, 고한 구공탄시장
📌 고한 구공탄시장
• 위치 : 강원 정선군 고한읍 고한4길 46
• 운영시간 : 10:00 ~ 22:00
* 매월 1일/6일마다 5일장 개장
• 입장료 : 무료
• 주차료 : 2시간까지 30분 마다 500원
* 2시간 초과 시 매 10분마다 300원

강원도의 고한읍은 예로부터 석탄산업의 중심지였다고 합니다. 이름마저, 구멍 9개짜리 연탄, 구공탄에서 유래된 고한 구공탄시장의 입구들은 갱도처럼 꾸며져 있죠. 시장의 곳곳의 기둥에는 막장에 들어가서 석탄을 캐던 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광부 모형들이 매달려 있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1967년에 개설해 50년 동안 이어져 온 강원도의 대표적인 전통시장 중 하나라고 합니다.


고한 구공탄시장을 쭉 둘러보면 구공탄에 구워 먹는 고깃집들이 많이 있는데요. 구공탄에 구워 먹는 고기들은 맛도 질도 상당히 많이 달랐습니다. 숯불이나 가스불이 아닌, 연탄으로 타지 않게 은은하게 익히는 고기들. 무엇보다 고기를 익히는 방식이 옛날에나 볼 수 있었던 연탄으로 굽는 방식이라 맛까지 더 구수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어떤 요소로 인해 이곳에서 먹던 고기가 그간 도시에서 먹었던 고기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던 건지 감히 판단할 순 없었지만, 단언컨대 근래 6개월 안에 먹었던 고기 중에서 압도적인 1등인 맛이었습니다.

고한 구공탄시장에서 강원도 정선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하고, 다음날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고한 구공탄시장으로 찾아왔습니다. 국수 1080이라는 이름의 식당을 정말 우연히 들리게 되었는데, 이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에는 전 날 먹었던 고기보다 더 따뜻한 온정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같이 손수 만든 데다 그릇이 넘치게 담겨있던 갖가지 반찬들, 그마저도 부족할까 걱정스러워 모자라면 이야기해달라는 사장님의 말씀, 거기다 서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가격. 이 식당에서의 음식과 사장님을 보고 있자니, 돌아가셨던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명절 때 할머니 댁에 내려가면 이만큼 많이, 맛있게 상 다리 부러질 정도로 한 상 차려주시곤 하셨기 때문이었죠. 할머님의 손맛과 정이 떠오르는 식당, 국수 1080. 여러분도 정선에 방문하시게 된다면 이곳은 꼭 들러보시기를 강력 추천드립니다.
# 정선의 기차 테마파크, 정선 레일바이크
📌 정선 레일바이크
• 위치 : 강원 정선군 여량면 노추산로 745
• 운영시간 : 10:30 ~ 14:50
* 11:30 ~ 12:30 휴게시간
• 입장료 : 2인승 30,000원 / 4인승 40,000원

정선에서 아마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라 생각하는 정선 레일바이크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레일바이크를 몇 번 타보긴 했었지만, 전국에서 이만큼 긴 레일바이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총 7.2킬로, 소요시간은 왕복 기준 약 1시간 30분 (레일바이크 약30~40분 + 풍경열차 25분)이라고 하는데요. 경험했던 바로는 안내받았던 것보다는 조금 덜 걸렸던 느낌이었습니다.


표를 끊고, 승차 시간이 될 때까지 레일바이크 출발지를 구경했습니다. 여치로 된 카페와 나비 모양의 화장실 그리고 개미 모양의 펜션까지 곳곳에 보였죠. 레일바이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해서 더 살펴보았더니, 근방에 곤충 테마파크인 벅스랜드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문에 곤충 모양의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운영을 안 하고 있어서, 직접 경험해 보진 못했지만 건축물들만 보더라도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졌습니다.


시간이 되어, 드디어 레일바이크에 올라타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출발하였습니다. 여전히 겨울이라 찬바람이 얼굴을 다소 시리게 하였지만, 레일바이크를 타고 지나오며 바라본 풍경 덕분에 그 시린 정도가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레일바이크 구간에는 총 3개의 터널 구간이 있는데, 이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역경을 뚫고 지나, 끝내 빛이 들어오는 구간에 진입하는 그런 장면들. 영화 속 장면들을 몸소 체험해 보며, 저의 인생도 빛이 드는 구간을 향해 질주 중이라고 대입해 봅니다


레일바이크는 터널도 터널이었지만, 기찻길을 지나오며 볼 수 있었던 바깥 풍경이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기찻길과 차도가 가로지는 구간에 진입하니, ‘띵띵띵’ 소리와 함께 차단기가 내려가는 모습들, 레일바이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멀리서 힘차게 인사해 주는 꼬마 친구. 그리고 해가 저물어가며 붉은빛으로 물드는 겨울의 풍경들. 터널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의 장면들이 펼쳐졌습니다.

함께 탄 사람과 호흡을 맞춰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레일바이크. 이 레일바이크 덕분에 옆에 있는 사람과 더 돈독해진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멈출 땐 함께 멈추고, 오르막 구간에서는 함께 힘을 들여 나아가며, 내리막에선 함께 몸을 맡기는 순간들이 반복되었죠.
레일바이크는 단순히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즐기는 즐길 거리가 아닌, 함께 하고 싶은 사람 혹은, 함께 하는 사람과의 호흡을 맞추는 체험이자, 애정을 더 샘솟게 하고 우정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체험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해 봅니다. 여러분도 레일바이크에서의 경험이 가족, 친구, 연인과의 ‘정’을 더 밀도 있게, 넘치게 가꿔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때론 다정하기도 하고 온정이 넘치기도 하고 애정을 쌓는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된 여행지, 정선. 정선에서의 여행은 제게 뜻밖의 정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모든 경험은 ‘정’의 형태만 달랐지, 모든 것이 다 ‘정’ 넘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정선은 ‘정’의 여행지라고 기억하고 싶어질 정도로 말이죠.
정선의 따뜻함 덕분에 정선은 겨울에 오기 가장 안성맞춤인 계절인 것 같습니다. 겨울 스키를 즐기러 정선에 오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은 이곳의 감성이 느껴지는 여행을 경험해 보세요. 몸은 추울지라도, 마음의 온도는 따뜻하게 데워주는 순간들이 눈으로 깔린 화이트카펫 끝에서 분명,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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