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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축제, 올림픽 이모저모

인류 최대의 축제, 올림픽 이모저모
지난 8월 6일 브라질의 세계적 미항인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제31회 하계 올림픽이 막을 올렸다. 이번 올림픽은 남미 대륙에서 열리는 첫 번째 대회다. 경기 자체를 즐기는 것도 멋진 일이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스포츠 세계로 빠져보는 것은 어떠신지. 스포츠 진성 팬들은 기록과 역사에 집착한다. 이유가 있다. ‘이번 경기’는 지금 상대하는 선수만 이기면 된다. ‘역사와 기록’을 상대하면 역대 모든 위인들과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 경쟁의 범위와 시간적 지평을 무한대로 확대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 올림픽에는 어떤 사연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까?




복귀한 종목과 사라진 종목


골프가 112년 만에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돌아왔다. 골프는 1900년 파리 올림픽에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됐지만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을 끝으로 사라졌다. 우리 여자 골프 대표팀은 이번 올림픽에서 금·은·동메달을 싹쓸이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럭비는 1924년 이후 92년 만에 복귀한다. 럭비의 원조는 15인제 경기다. 힘을 중시하는 11인제 럭비도 있고 스피드를 중시하는 7인제 럭비도 있다. 리우에서는 7인제가 채택됐다. 한국 남자 럭비는 본선 진출에 나섰으나 아쉽게 탈락했다. 15인제 럭비는 호주, 뉴질랜드, 영국, 남아공, 프랑스 등이 강호다. 7인제의 역대 최강은 피지다.



올해 열리는 리우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이 걸려있는 종목은 육상이다. 육상은 올림픽의 꽃으로 불리는 마라톤을 비롯해 다양한 종목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없어진 종목도 수두룩하다. 가장 대표적인 종목이 바로 60미터 달리기다. 지금은 100미터 달리기가 최단거리지만 예전에는 60미터 달리기가 별도로 존재했다. 제자리 멀리뛰기와 제자리 높이뛰기, 제자리 세단뛰기도 정식 종목이었다. 던지기 종목에서도 과거에는 돌 던지기, 양손 포환던지기나 양손 원반던지기 같은 종목이 있었다. 


영국과 영연방국가에서 인기가 높은 크리켓은 1900년에 선보였지만 크로케, 바스케 페로타와 함께 사라졌다. 폴로는 1900년부터 1936년까지 5차례 모습을 보인 뒤 정식 종목에서 빠졌다. (폴로는 말을 타고 벌이는 하키로 우리 전통문헌에 나오는 격구(擊毬)와 흡사한 종목이다. 역대 최고의 격구 선수는 태조(太祖) 이성계다) 리얼 테니스(실내에서 하는 테니스의 원조), 라크로스(잠자리채 같이 생긴 막대를 사용해 상대방의 골문에 공을 넣는 팀 스포츠), 모터보트, 라켓(스쿼시의 전신) 등도 한때는 올림픽 종목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줄다리기’도 올림픽 종목(1900-1920)이었다. 한 팀 당 여덟 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며 경기 시간은 5분이다. 6피트를 잡아당기면 승리한다. 5분이 지나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으면 결과 종료 시점에서 우세했던 팀이 이긴다. 삼판 양승제로 진행됐다. 1920년 안트워프 올림픽에서 ‘세계 최강’ 영국은 네덜란드를 28.2초, 13.4초 만에 물리치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가장 최근에 없어진 종목으로는 역도 추상(Clean&press)이다. 용상(clean&jerk)은 바벨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 뒤 다리 근육을 이용해 머리 위로 드는 것이다. 인상(snatch)는 바벨을 들어 올린 뒤 주저앉은 자세에서 그대로 일어나는 기술이다. 추상은 몸을 수직으로 세우고 일체의 반동 동작 없이 가슴에 지지한 바벨을 밀어 올리는 기술이다. 우리나라 김성집 선생은 이 프레스에서 122.5kg으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메달 경쟁을 펼쳤다. 이집트의 이스마일 라갑과 같은 합계를 기록했는데 체중 차에서 450g 가벼웠던 김성집(73.4kg) 선생이 포디엄에 올랐다. 추상은 1972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올림픽이 낳은 세기의 기록

: 포켓 헤라클레스, 나임 슐레이마놀루


1988년 9월 20일 서울 올림픽 역도경기장에서 남자 역도 60kg급 결선이 진행됐다. 유력한 우승후보는 터키의 ‘나임 슐레이마놀루’였다. 슐레이마놀루는 키 155cm으로 체구가 작았지만 152cm인 아버지와 141cm인 어머니에 비하면 가족 중 최장신이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그는 14세 때 이미 합계 중량 성인 세계 신기록을 깨버린 괴물이었다. 서울 올림픽에서도 세계 신기록 행진을 이어갈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인상 1차 시기에서 145kg을 들어 올려 올림픽신기록(종전 130kg)을 가볍게 넘어선 뒤, 2차 시기부터 본격적인 세계 신기록 행진에 들어갔다. 인상 2차 시기에서 150.5kg을 들어 올려 세계 신기록(종전 150kg)을 수립한 그는, 3차 시기에서 152.5kg을 들어 올려 또다시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다. 기록 행진은 용상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용상 1차 시기에서 175kg을 성공해 올림픽 신기록(종전 160kg)을 수립했다. 2차 시기에서는 한꺼번에 13.5kg을 늘려 세계 기록인 188.5kg에 성공했다. 술레이마놀루는 3차 시기에서 190kg에 도전, 자신의 몸무게(59.7kg) 3배 이상을 들어 올리며 신기록을 작성했다.




슐레이마놀루의 본명은 슐레이마노프, 조국은 불가리아였다. 1984년 불가리아 정부가 소수민족 탄압정책을 펴면서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그는 1986년 11월 호주 멜버른 월드컵 대회에서 팀을 이탈, 터키로 망명했다. 1988년 슐레이마놀루는 인상, 용상, 합계 세계 신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며 시상대의 맨 위에 선다. 공교롭게도 은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불가리아의 스테판 토프로프다. 그는 불가리아에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고, 터키를 대표하는 영웅이 됐다.




그는 이후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까지 제패해 역도에서 사상 첫 3연패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영원한 전설로 남았다. 어느 식당엘 가든 주인이 돈을 받지 않고, 과속을 해도 경찰이 에스코트를 해주며 길을 터주었다. 단신인 탓에 포켓 헤라클레스라 불리던 이 전설적인 역사는 2014년 터키의 TV광고에 배불뚝이 아저씨 모습으로 출연해 전 세계 팬들과 다시 만났다. 역시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올림픽이 낳은 희대의 오심

: 1972년 뮌헨 올림픽 남자농구, 미국vs소련


역대 최악의 오심으로 회자되는 사건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있었던 미국과 소련의 남자농구 결승전이다. 당시 오심의 피해자는 미국, 수혜자는 소련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시절, 서독에서 열린 이 경기는 정치적으로도 큰 이슈였다. 미국은 경기 종료 3초 전 자유투 2개를 성공하며 50-49 한 점 차로 앞섰다. 


소련은 롱패스로 골밑까지 공을 던졌으나 미국 선수가 밖으로 공을 걷어냈다. 이겼다고 생각한 미국 선수들이 코트 위로 뛰어나왔다. 방송에서도 미국의 승리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심판은 경기를 3초 전으로 되돌리고 다시 경기를 하라고 명했다. 미국 선수들이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 감독이 프리스로 후에 작전타임을 신청했다는 이유였다.



다시 소련은 롱패스를 시도했다. 그사이 3초가 흘렀다. 이번에는 국제농구연맹의 사무총장인 윌리엄 존스가 심판에게 시간을 3초 전으로 돌려 다시 시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심판은 이의를 달지 않았다. 3초의 시간을 다시 부여받은 소련은 알렉산더 벨로프가 골밑슛을 성공하면서 51-50로 승리를 거뒀다. 


금메달을 놓친 미국은 이후 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제소했으나 판정 번복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국 체육계는 올림픽 농구경기에 무기한 불참하겠다고 위협했고 항의의 표시로 은메달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위협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미국농구팀이 우승할 때까지 계속됐다. 수상을 거부한 은메달은 여전히 IOC가 있는 스위스 로잔에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