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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가진 힘, 그리고 그 유연함에 대한 찬사

한글이 가진 특별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세계에는 7천 개가 넘는 언어가 존재하지만, 실제로 문자 체계를 가진 언어는 극히 일부인데요.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같은 라틴 문자를 사용하고,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도 비슷한 글자를 쓰죠. 하지만 우리는 오직 우리말을 위한 '맞춤형 문자', 즉 한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한글의 가장 독보적인 특징입니다.

 

# 우리 한글의 유연성

대부분의 문자는 거슬러 올라가면 그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알파벳 A는 거꾸로 뒤집으면 소의 뿔과 얼굴이 보입니다.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된 이 문자는 페니키아를 거쳐 그리스와 라틴, 아랍으로 퍼지며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모양만 남았어요. 그러나 한글은 완전히 다릅니다. 언어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한 왕이, 백성들이 쓰는 언어에 꼭 맞게 체계적으로 설계한 문자입니다.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고, 이러한 원리는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만들어졌습니다. 더 나아가 한글은 디지털 환경에서도 탁월합니다. 같은 의미를 표현하더라도 훨씬 적은 글자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영어로 "See you tomorrow"라고 쓸 때 13글자가 필요하지만, 한국어로는 "낼 봐" 두 글자면 충분하지요. 한 글자 안에 담긴 정보의 밀도가 매우 높기 이유입니다.

 

다른 나라에도 자국의 언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과 제도가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간체자를 도입해 문해율을 크게 높였고, 한어병음을 만들어 로마자만으로도 중국어를 읽고 입력할 수 있게 했어요. 미국에서는 노아 웹스터가 미국식 맞춤법을 정리하고 사전을 제작해 언어의 표준을 세웠는데요. 독일은 한때 라틴어에 비해 미개하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그림형제가 라틴어와 독일어의 어원적 연관성을 증명하면서 독일어의 위상을 회복시켰습니다. 캐나다 퀘벡주는 불어를 지키기 위해 법으로 언어를 관리합니다.

 

공공문서와 교육은 물론 정치에서도 불어 사용이 의무입니다. 상품 포장지에도 불어 표기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며, 도로 표지판의 STOP 표지도 ARRET로 바뀌었어요. 언어가 정책을 통해 보호받는 대표적인 사례죠.

 

언어는 시대와 함께 변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중국식 영어 표현이 유행어처럼 퍼지고 있어요. "You can you up, no can no bibi"는 '할 수 있으면 해, 못 하면 투덜대지 마'라는 뜻이고, "Good good study, day day up"은 '열심히 공부하고 매일 발전하라'는 의미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자연스럽게 쓰는 "Long time no see"도 원래는 중국어 표현 '好久不见'을 직역한 말인데요. 문법적으로는 영어에 맞지 않지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쓰이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영어에도 새로운 단어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어요.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 갑자기 뒤에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photobomb',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민망함을 표현하는 'facepalm' 같은 단어들이 그 예입니다. 최근에는 'bibimbap'도 사전에 등재되었어요. 한식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일본어는 외래어 비중이 매우 높아요.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에서 차용된 단어가 일상 속에 녹아 있죠. 예를 들어 바지를 뜻하는 '주본(ズボン)'은 프랑스어 'jupon'에서, 담배 '타바코(タバコ)'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일본어는 이렇게 들여온 단어에 자국식 문법을 더해 새로운 형태로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영어 단어 'miss'에 일본식 동사 어미 'る'를 붙여 'ミスる(미스루)'라 하면 '실패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반대로 외래어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나라들도 있어요. 멕시코에서는 외래어를 자국어로 바꿔 쓰는 경우가 많아요. 컴퓨터는 'ordenador', 마우스는 'ratón'이라고 부르며, 의미를 번역해 사용한답니다.

 

이처럼 언어의 변화와 차용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래서 신조어나 외래어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어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백성들이 매일 쓰는 말을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스마트폰, 컴퓨터, 인터넷 같은 새로운 개념을 모두 한글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한글의 놀라운 유연성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세종이 지금의 세상을 본다면 "내가 정말 글자 하나는 잘 만들었다"고 말하며 미소 지으실지도 몰라요.

 

# 한글 창제의 배경과 취지

세종 시대에는 문자 생활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는 사회적 요구가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그 결과, 1443년 음력 12월에 이르러 문자 혁명의 결실로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는데요. 창제의 목적은 세종이 직접 저술한 [훈민정음 해례본] 예의편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한국어는 중국어와 달라 한자로는 제약이 많았고, 고유 문자가 부재하여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큰 불편이 있었죠. '훈민정음'이라는 이름 자체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세종의 어제 서문과 정인지의 서문에서 분명히 밝혀진 바와 같이, 한문 의존에서 오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창제된 한국 고유 문자였습니다.

 

한편, 창제 5년 뒤인 1448년에는 [동국정운]이 간행되었는데, 이는 조선에서 사용되던 한자음을 중국 원음에 맞추어 교정하고 통일하기 위한 책이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한글을 이용하여 한자의 발음을 표기함으로써, 한글이 한자·한문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도구로 폭넓게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세종의 대응

왜 신하들은 한글의 창제를 반대 했을까?

그러나 새로운 문자 창제에 대해 모든 이가 동의한 것은 아니었어요.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신하들은 연명상소를 올려 강력히 반대하였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문자를 제작·보급하는 행위가 사대 질서에 어긋나고 오랑캐의 행위와 같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한글을 '촌부들이나 쓸 만한 상스러운 문자'라 깎아내리며, 학문의 쇠퇴와 정치적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고 비판했어요. 더 나아가 억울한 옥사 문제는 문맹 때문이 아니라 관리들의 불공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새로운 문자 도입은 불필요하다고 강변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언어학과 음운학적 근거를 들어 반박하며, 한글은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이두와 다르지 않다고 역설했어요. 그러나 반대가 극심해지자 세종은 정창손을 파직하고, 최만리를 포함한 7명의 신하들을 하루 동안 의금부에 가두는 강경책을 썼습니다. 이후 이들은 풀려났지만, 최만리는 곧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어요. 특히 김문은 기존에 찬성하던 입장을 번복해 반대에 가담한 책임으로 곤장 100대를 맞는 처벌을 받았습니다.

 

# 세종의 의지와 신념

반대를 무릎 쓰고 세종의 한글 창제는 계속되었다.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경한 조치를 취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과거 충격적인 패륜 사건을 계기로 백성을 교화하고 계몽할 필요성을 절감했으며, 이를 위해 배우고 쓰기 쉬운 한글을 널리 보급하려 했습니다.『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배포해 백성들에게 윤리적 가르침을 전하려 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지요. 그러나 정창손은 "삼강행실 실천 여부는 개인의 성품에 달린 것이지, 쉬운 문자로 바꾼다고 달라질 수 없다"는 논리로 반대했고, 세종은 이를 유학적 도리를 거스르는 발언으로 보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세종은 평소 온화한 성품이었지만,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문자'라 비하하는 신하들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여 왕으로서 권위를 내세우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다만 이 같은 강경 대응 이후에는 한글 반포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 상소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1446년 정식 반포 이후에도 논란은 자취를 감추었어요. 세종은 최만리 등 일부 보수적 학자들과 달리 시대를 앞선 혁신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글 창제가 백성을 두루 이롭게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반대 세력을 하옥하면서까지 새로운 문자의 보급을 밀어붙였어요.

 

결국 그의 결단과 의지는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탄생시켰고,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의 자부심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 한글 반포 시기를 둘러싼 두 가지 견해

훈민정음의 반포 시기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해왔어요. 일부 학자들은 세종 25년(1443) 12월, 정음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시점을 반포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세종 28년(1446) 9월, [훈민정음] 해례본이 간행된 시점을 반포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념하는 「한글날」은 후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정인지의 서문에 기록된 「九月上澣」을 음력 9월 10일로 해석하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것입니다. 몰랐던 사실이지요?

 

# 한글 창제와 반포의 의미

사실 한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창제'에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포'를 중시하는 이유는 현대에 들어 한글날을 제정할 때 그 기준을 반포 시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세종 25년 말에 이미 정음이 세상에 알려지고, 이듬해에는 관련 사업이 시작되었으므로 이 시점을 반포로 보아도 무리는 없어요. 비록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나름의 절차를 거쳤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굳이 반포라는 개념을 강조한다면, 단순히 세상에 알려진 시점보다 '절차와 격식'을 갖춘 시기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종 28년의 반포설에 힘이 실립니다. 해례본이 간행된 것도 중요한 절차였지만, 무엇보다 책의 첫머리에 실린 [어제문]이 결정적 증거라 할 수 있어요. 이는 세종이 친히 새 문자를 만들어 백성에게 내린 뜻을 밝힌 글이기 때문입니다.

 

한글의 탄생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글의 위대함은 바로 그 유연성에 있습니다. 시대가 변해도, 단어가 새로 생겨도, 우리는 여전히 그 소리를 한글로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는데요. 그것이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문자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노랫말이 있습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점 하나로 뜻이 달라지는 이 섬세함이야말로 한글의 아름다움이자 위대함을 상징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한글이 가진 힘, 그리고 그 유연함에 대한 찬사로 마무리합니다. 언어는 살아 움직이고, 한글은 그 변화의 모든 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완벽한 그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