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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거나 귀엽거나 순수한 것에 쏟아지는 사랑, 무해력

작거나 귀엽거나 서툴고 순수한 것들이 사랑받고 있어요. 이처럼 작고 귀엽고 순수한 것들의 공통점은 해롭지 않고, 그래서 나에게 자극이나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며, 굳이 반대하거나 비판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죠.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푸바오와 그 뒤를 잇는 레서판다, 햄스터 밤톨이 같은 깜찍한 동물들, 세상 모든 것을 작디작게 만드는 미니어처 열풍, 서툰 말씨와 대충 그린 이모티콘이 더 사랑받는 현상에는 이런 무해한 사물들의 준거력, 바로 '무해력'이 자리하고 있어요.

 

# 1. 작아서 무해한 '앙증깜찍' 무해력

▲ 같은 사물도 작게 다시 만들면 깜찍하다, '미물즈'

사물의 크기가 작으면 우선 나에게 무해할 것이라는 안도감이 들어요. 나아가 조그맣고 예쁜 사물은 앙증 맞고 깜찍하죠. 작은 것은 사랑스럽고 보고 있으면 저절로 무장해제되기 마련입니다.

 

포장해 온 초밥 안에 들어있는 간장붕어 용기나 작은 우산을 누구나 한 번씩 보관해 본 기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앙증맞은 '작은 물건' 인형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를 모으고 있는 '미물즈'는 작은 붕어 모양의 간장 용기를 제작하고 외롭지 않게 락교와 와사비를 함께 만들면서 미물들의 세계를 완성해 나가요.

 

미물즈가 만들어 판매하는 옥춘사탕, 꿀떡, 웜뱃의 응가 등 "작은 존재들을 연구해 만든 핸드메이드 작품"들은 어른들의 애착 인형으로 안성맞춤이라는 반응을 얻고 있답니다. 제품 이름도 예쁘고 깜찍한데요. 먼지 모양 인형 한 개의 이름은 '먼지', 두 개의 이름은 '먼지먼지', 세 개의 이름은 '먼지먼지먼지'랍니다.

 

▲ 키덜트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른 미니어처, '미니벌스'

깜찍함이 사랑 받는 분위기에 미니어처 시장도 활기를 되찾고 있어요. 과거 일부 마니아층 사이에서 소장 가치를 인정받던 미니어처가 지금은 Z세대의 키덜트 문화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주식회사 손오공은 글로벌 인기 완구 기업 MGA의 미니어처 브랜드 '미니벌스(Miniverse)'를 2024년 여름 국내시장에 들여왔어요. 음료 머신을 골라 에스프레소, 밀크티, 주스, 소다 등을 만들어 나만의 홈카페를 만드는 '홈가전' 시리즈와 어항, 화분, 캔들 등이 포함된 '라이프스타일' 시리즈가 특히 인기랍니다.

 

아담한 캡슐토이를 판매하는 '가챠숍'에도 사람들이 몰려요. 가챠숍의 '가챠'는 '찰캉찰캉' 소리를 표현한 일본어 '가챠가챠’에서 유래했는데요. 캡슐토이를 뽑는 기계에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리면 나는 철 부딪히는 소리입니다. 한 손에 쥘 수 있는 캡슐 안에는 미니 피규어, 인형, 문구류 등 다양한 장난감이 들어있어요.

 

▲ 소비자 마음 사로잡은 한입 크기 음식, 한입 케이크

 

음식에서도 자그마한 무해력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이에요. 음식은 푸짐해야 좋지만 작아서 더 각광받는 음식도 있답니다. 지름이 5cm도 채 되지 않는 초미니 '마이크로 케이크’가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어요.

 

손바닥에 올라갈 만큼 작은 크기라서 '한입 케이크'로도 불리는데요. 작은 크기에도 케이크의 기본 요소는 모두 들어 있어서 아기자기한 데코레이션이 깜찍해요. 스타벅스에서는 한입 크기의 핑거푸드 '쁘띠 까눌레'를 출시하기도 했어요.

 

두 제품 모두 크기와 비교해 가격이 비싸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오히려 음식을 낭비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색다른 디저트라는 긍정 평가가 뒤를 따랐어요.

 

# 2. 귀여워서 무해한 ‘귀염뽀짝’ 무해력

▲ '유어네이키드치즈'의 귀염뽀짝 치즈 플레이팅

 

요즘 온라인에서는 '귀염뽀짝하다'는 표현을 흔히 볼 수 있어요. '뽀짝'은 바싹 붙는다는 뜻의 전라도 지역 방언인데요.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예쁜 것을 한결 더 귀엽게 말할 때 사용해요.

 

서울 성수동과 부산 해운대에 매장을 연 '유어네이키드치즈'는 세계 여러 나라의 치즈와 와인을 다루는 치즈 편집숍입니다. 이곳은 아기자기 하고 예쁜 플레이팅으로 입소문을 탔어요. 고다치즈와 황치즈, 콜비잭과 페퍼잭으로 여름 풍경을 표현한 썸머치즈플래터는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귀염뽀짝 모습으로 화제가 됐어요.

 

서울 서교동에 자리한 '프레시플러시'는 그로서리 마켓 콘셉트를 내세운 반려견 장난감 매장인데요. 미국 현지 마트가 떠오르는 화려한 외관에 과자와 우유, 소스류 등 실제 식품을 닮은 장난감 인형들이 구비돼 반려견은 물론 견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아요. 이런 귀염뽀짝 분위기 덕분에 마트 바구니에 반려견을 태워 '반려견 인생샷'을 찍을 수 있는 스튜디오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답니다.

 

▲ 귀여움을 덧입혀 사랑받는 소품들, '헤로키'의 꼴찌토마토 인센스 홀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에 귀여움을 덧입혀 작품으로 만드는 작은 공방들도 관심을 모아요. 레진(resin) 공예품 작가 '헤로키'가 선보인 귤 한 알의 앙증맞은 모습을 담은 'ㄹㅇ귤임 그립톡과 접시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토마토를 묘사한 '꼴찌토마토 인센스 홀더' 등은 기획력으로 뜨거운 사랑을 얻었습니다.

 

강원도의 농수산물을 키링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삶은 감자' 작업실의 제품도 품절 사태를 빚었어요. 밭에서 갓 캐낸 감자 모양의 '알감자키링'은 재입고 될 때마다 곧바로 품절되고, 호래기가 떠오르는 '동해안 오징어키링' 역시 구입이 쉽지 않을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 있어요.

 

귀여운 키캡으로 키보드를 꾸미는 취미도 인기입니다. 키보드 마니아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키감과 타건음을 찾기 위해 윤활제를 바르거나 보강판을 대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를 '키보드 커스텀'이라고 해요.

 

최근에는 조작을 편하게 하는 기능 보다 그저 예쁜 키보드를 만들기 위해 깜찍한 인형이나 캐릭터 모양의 키캡을 씌워 커스텀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어요. 귀염뽀짝한 것에 대한 최근의 관심이 기능만 갖추면 충분하던 키보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죠.

 

# 3. 서툴러서 무해한 ‘순수대충’ 무해력

▲ 소소한 일상으로 힐링을 전하는 무해한 콘텐츠, 소셜미디어 채널 '슬기로운 할매생활'

 

자극적인 정보가 쏟아지는 정보화 시대, 디지털에 대한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된 소비자들이 '서투르지만 순수한 대상'을 찾고 있어요. 비록 완성도는 낮더라도 악의 없고 무해한 대상에 호감을 갖고 환대하는 것입니다.

 

대중은 때로 경험이 부족한 서투름에서 드러나는 순수한 모습에 호응하는데요. 어르신들이 외국 요리를 조리하는 모습을 다루는 소셜미디어 채널 '슬기로운 할매생활'의 콘텐츠가 대표적입니다.

 

중국요리 '멘보샤'와 중동 음식 '후무스', 이탈리아 파스타 '뇨끼'와 '라자냐'처럼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난생 처음 듣는 요리를 만들어 보는 것이 콘텐츠의 주요 내용입니다. 제주 사투리로 라자냐 조리법을 읽는 모습이나, 메뉴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하면서도 새롭게 시도하는 요리에 즐거워하는 모습이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보여요.

 

▲ 반려돌

 

순수한 것으로 치면 '자연'만 한 것이 없죠. 2019년 5월 재단장해 개원한 서울식물원은 4년 만에 방문자가 2,000만 명을 넘어섰고, 2024년에는 전년 보다 방문자 수가 2배나 폭증했어요. 축구장 70개 크기의 초대형 도심형 식물원인 서울식물원은 우리나라의 자생식물뿐만 아니라 세계 12개 도시에서 옮겨 온 식물까지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어요.

 

무주의 청정지역에서 반딧불이를 찾아보는 야간 여행도 인기가 뜨거워요. 1997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무주반딧불축제'는 최근 방문객 수가 크게 늘었어요. 2023년 제27회 축제에는 무려 42만 명의 관광객이 몰렸어요. 천연기념물 제322호인 반딧불이를 눈앞에서 관찰하는 '반딧불이 신비탐사'는 어른 아이 누구에게나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축제 시작 전부터 일찌감치 예약이 마감된답니다.

 

반려동물이 크게 늘어 '개모차'가 유아차보다 많이 팔리기 시작한 가운데, 비교적 신경이 덜 쓰이는 반려식물을 키우는 반려인도 증가했어요. 최근에는 돌처럼 무생물을 반려로 삼는 사람까지 늘고 있는데요. 예전에 어르신들이 수집하던 수석과는 달리 반려돌은 그저 평범한 모양일 때가 많아요. 돌 같은 무생물은 반려동물이나 반려식물처럼 보살피는 노력이 전혀 필요 없어요. 어쩌면 그래서 가장 순수한 반려대상으로 반려인의 환영을 받는지도 모릅니다.

 

▲ 부족하고 대충인 것에서 느끼는 친근함, '왼그기그'

 

뭔가 부족한 듯, 그냥 대충 만든 듯, 그러면서도 친근한 것도 치유의 힘을 자랑해요. 카카오 이모티콘샵에서도 대충 그린 이모티콘이 인기가 더 많은데요. 키워드 검색 결과를 보면, '대충'이 126개, '하찮은'이 208개로, 일상 대화에서 자주 쓰이는 '안녕'이나 '뭐해'를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망그러진곰' 같은 소위 '하찮은 계열'의 이모티콘이 부쩍 인기몰이 중입니다.

 

요즘 카카오톡에서 인기를 몰이 끌고 있는 하찮은 이모티콘에는 낯설음보다는 익숙한 매력이 있어요. 마치 내가 펼쳐둔 메모장 구석에서도 비슷한 낙서를 찾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B급의 한계를 넘어선 '대충'의 매력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요.

 

'삐뚤빼뚤' 그림을 전시하는 작가도 있어요. '왼그기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시빈 작가는 왼손으로 그린 기린 그림 80점을 전시해 성공적인 호응을 이끌어 냈죠. 이후 더현대 대구 팝업스토어, K-일러스트레이션페어, 2024 서초뮤직앤아트페스티벌 등 다양한 행사 현장에서도 꾸준히 주목받고 있어요.

 

# 4. 무해력이 곧 생존력이다

▲ 귀염뽀짝냥이

 

'무해'는 원래 '식품이 인체에 무해하다'라는 표현에서 시작된 말이에요. 최근 들어서는 매우 널리 사용되고 있죠. DO No Harm 원칙은 코로나19 백신 개발 과정에서 백신 안정성 원칙으로 적용됐고, 인공지능, 자율주행, 자동차, 생명과학, 환경보호 등 여러 영역에서도 윤리성의 핵심 기준이 되고 있어요.

 

나아가서는 무해한 예능, 무해한 드라마, 무해한 조합, 무해한 2인자 등 콘텐츠와 인물에 이르기까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용하는 용어로 거듭났어요. 온라인 서점에서 '무해한'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무해한 사람』, 『무해한 인간관계』, 『무해한 이슬람』, 『무해한 돈벌이』 등 수많은 책들이 줄줄이 소개돼요. 가히 무해함 전성시대입니다.

 

그렇다면 무해한 것들이 요즘 들어 왜 인기일까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열광하는 무언가는, 역설적으로 그 공동체에서 가장 결핍된 요소를 보여줘요. 지금 한국 사회가 무해력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 공동체가 그만큼 상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지도 몰라요.

 

실제로 요즘 젊은 세대는 스스로를 '긁힌 세대라고 부르며, 뭔가 자존심이 상했을 때 "긁혔다"라고 표현하곤 하죠. 긁히면 상처가 나는데요. 어쩌면 긁힌 상처를 아물게 해줄 무해한 무언가, 또는 긁어도 상처를 내지 않고 삶의 가려움을 가라앉혀줄 그 무언가가 필요한 시대인지도 몰라요. 단지 예뻐서 좋아하는 것이든,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찾는 것이든, 요즘 무해한 것들의 인기가 뜨거운 이유입니다.

 

▲ 귀여운 키캡

 

무해함은 하나의 심리적 안전지대를 만들어줘요. 무해한 존재들이 중요해지는 시대적 배경과 그 특성을 적확하게 파악할 때, 비로소 무해력을 활용한 효과적 대응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무해력은 이제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한 줌의 희망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생존 비결이 되었죠.

 

자료: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