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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반 맛집, 아무 것도 없는 위대한 밥상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백수(白手)는 흰 손이 아니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손이다. 백반(白飯)은 흰쌀밥이 아니다. 아무런 반찬이 없는 밥상이다. 백숙(白熟)도 마찬가지다. 하얗게 끓인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냥 삶은 게 백숙이다. 백반은 밥과 국 그리고 된장, 간장, 고추장 등의 장(醬), 푸성귀, 김치 등의 지(漬), 식초 등이 놓인 밥상이다. 국이나 장, 지, 초는 반찬으로 치지 않는다. ‘밑반찬’이다. 국과 밑반찬만 있고 반찬이 없는 밥상이 바로 백반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4년(1458) 6월의 기록, 세조가 말한다. “앞으로 내가 먹는 밥을 지을 때 백미(세갱미, 細粳米)를 쓰지 마라. 백미는 제사에만 쓰도록” 백미는 귀했다. 그런데 백반이 흰쌀밥이라고? 그렇지 않다. 반찬이 없는 밥상이다. 백미가 귀한 판에 상민들이 귀한 백반을 먹었을 리는 없다.



오늘날 밑반찬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반찬이 아니다. 나물 반찬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넓은 범위의 ‘지(漬)’에 속한다. ‘지’는 ‘나물+장류 혹은 식초’의 결합체다. 겉절이는 싱싱한 채소에 간장 혹은 된장을 섞고 식초를 넣은 것으로 ‘지’에 속한다. 무채, 시금치 무침, 취나물 무침, 콩나물 무침 등도 ‘지’다.‘장’은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담북장 등 모든 장류를 아우른다. 날것으로 내놓든 끓여서 내놓든 모두 ‘장’에 속한다. 모두 밑반찬이지만 정식 반찬은 아니다. 반찬이 없는 밥상, 백반은 결국 ‘밥+국+장, 지, 초’의 밥상이다.



“사람이 밥 먹을 정도는 줘야지” 순천 ‘쌍암기사식당’


호남 출신 혹은 호남에 오래 산 사람들은 말한다. “백반 집? 골목마다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이다. 사실이다. 호남에는 백반집이 많다. 메뉴가 따로 없다. 주인장이 차려주는 대로 먹으면 된다. 백반 밥상에 밑반찬이 15-20종류 정도 깔리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의 ‘쌍암기사식당’ 그야말로 푸짐하다. 생선구이, 돼지고기 김치볶음, 꼬막, 계란찜 등 15가지 반찬이 주르륵 깔린다. 전국으로 음식 공부를 다니다 보면 혼자 이동할 때가 많다. 이 집도 혼자 갔다. 1인분은 팔면 팔수록 손해다. 이럴 때 참 미안하다. 인건비와 식재료비 때문에 호남의 백반 밥상은 서울 진출이 힘들다.


‘쌍암기사식당’의 경우 지난해부터 밥값을 8천원으로 올렸다. “반찬 좀 줄이고 가격을 낮추면?”이라고 이야기하다가 욕먹는 수 있다. 호남의 밥 인심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주인장은 “사람이 밥 먹을 정도는 줘야 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비 오는 날, ‘쐬주’ 한 잔 즐기기 좋은 마포 ‘호남식당’


호남 백반과 비슷한 음식을 내놓는 집이 마포 우성아파트 부근에 있다. 좁은 골목길에 있어서 설명으로는 찾기 힘들다. 호남 출신의 여주인이 몇몇 지인들과 운영하는 작은 밥집이다. 가끔 주인 혹은 주방 찬모로 보이는 분이 전화 통화를 한다. 거의 외국어 수준이다. 굉장히 진한 호남 사투리로 통화를 한다. 왠지 푸근하고 정겹다.



여름철에는 크기도 고르지 않고 여기저기 찢어진 상추가 나올 때가 있다. 가게 앞의 화분에서 따온 상추다. 맛있다. 오래전에 어느 글 쓰는 이가 “비 오는 날 조기찌개 시키고 ‘쐬주’ 한 잔하면 딱 좋은 집”이라고 소개해서 유명해졌다.


언젠가 돼지불백을 먹고 나오는데 고기가 꽤 남았다. 주인이 묻는다. “왜? 맛이 없소? 뭐땀새 요로코럼 많이 남기요?” 필자도 소심한 복수(?)를 했다. “사람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줘야지, 1인분인데 2인분만큼 주니 다 먹을 수가 없잖아요” 푸짐하다.



‘빗물 젖은 밥’의 추억, 인천 강화도 ‘우리옥’


두어 해 전에 MBC 예능 프로그램 <찾아라! 맛있는 TV>에 출연한 적이 있다. 강화도 편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던 중 찾아갈 맛집 후보를 보니 ‘우리옥’이 있었다. 아뿔싸, ‘우리옥’은 1980년대 중반부터 30여 년을 다녔다. 원래 가마솥에 밥 짓는 집으로 유명했다.


1990년대 초반, 이 집에 간 적이 있다. 하필이면 홍수가 나서 집안이 온통 물바다였다. 나무도 다 젖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힘들었다. 주인장은 골판지를 구해서 가마솥에 밥을 지어 주었다. ‘눈물 젖은 밥’이 아니라 ‘빗물 젖은 밥’이었다.



역사도 오래됐다. 반세기를 훨씬 넘겼다. 제작진에게 사정을 말했다. “나, 이 집 잘 안다. 자주 가진 않지만 주인이 얼굴을 알는지도 모른다.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다” 검증하는 이들 혹은 제작진이 식당 주인과 ‘짜고 치는 고스톱’인 경우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할 때다. 이날 음식이 다 나온 후 필자만 늦게 입장해서 무사히 촬영을 마쳤다.


음식을 공부하는 이들은 우리옥의 ‘내공’을 안다. 전형적인 백반(白飯)이다. 이날 일본인 조리사 요나구니 스스무 씨가 검증단으로 동행했다. 그는 한국 음식을 상당히 정확하게 짚어낸다. “이 집 밑반찬을 하나씩 코스 식으로 내면 아주 대단한 음식이 될 것 같다” 우리옥에 대한 최고의 찬사라고 믿는다.



이제는 사라진 마포 ‘착한밥상’과 새 구내식당 ‘황금콩밭’


서울 역삼역 국기원 부근에 사무실이 있었다. 한해 남짓 머물다가 마포로 이사를 했다. 지인들에게 “밥 먹을 집이 없어서 이사를 한다”고 했더니 ‘설마?’하는 눈치였다. 사실이다. 역삼역, 강남역 부근에는 인스턴트 음식이 대세다. 음식을 조리(調理) 하는 게 아니라 조립(組立) 해내는 집이 대부분이다. 늘 속이 불편했다. 매일 점심, 저녁을 ‘지나치게 맛있는 것’으로 해결해야 한다면 고역이다.



문제는 마포에도 별다른 집이 없더라는 것. 그러다 발견한 집이 애오개역 부근의 ‘착한밥상’이었다. 주인장의 음식 솜씨가 수준급이고 반찬들이 짭조름한 게 맛있었다. ‘구내식당’으로 부르고 거의 매일 출근했다.


2016년 여름, 주인이 일을 하다가 몸을 다쳤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가게 문을 닫고 한 달 간 여행을 떠났다. 한 달이나 갈 수 없다니,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설상가상. 여행지에서 전화가 왔다. “전라도 여행 중인데 장흥이 너무 좋아서 장흥에서 살기로 했어요” 멍했다. 왜 이렇게 동화, 만화 같은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지.



백반 집을 오래 운영하면 지친다. 별 생색도 나지 않는, 가격 낮은 음식을 매일 해낸다는 건 힘들다. 게다가 늘 밑반찬을 바꿔야 한다. 다행히도 ‘착한밥상’의 주인장이 소개해준 두부 전문점이 인근에 있었다. ‘황금콩밭’이다. 매일 만든 두부로 두부찌개를 끓인다. 청국장, 된장찌개도 먹을 만하다. 반찬 네댓 가지도 좋다. 가격도 6-7천 원대니 먹을 만하다.



깔깔대고 웃었던 경기도 포천 ‘욕쟁이 할머니집’


식당을 다니다 보면 혼자서 실실 웃는 일이 있다. 경기도 포천의 ‘욕쟁이 할머니집’에 갔을 때는 여럿이서 깔깔대고 웃었다. 이 집은 시래기 전문점이다. 백반인데, 시래깃국과 밑반찬 열두어 가지 정도가 나온다. 모두 정갈하고 먹을 만하다.



방송국 촬영 팀과 갔다. 촬영을 마치고 나오다가 가게 앞의 정류장 표지판을 본 순간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버스 정류장 이름이 ‘욕쟁이할머니’였다. 안내방송이 “다음은 욕쟁이할머니입니다”라고 할 것이다. 세상천지 이런 간판은 없을 터. 오래전부터 유명한 집이니 아마 정류장 이름도 이렇게 지었을 것이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맛집 정보

     1.   쌍암기사식당: 전남 순천시 승주읍 신성길 2 / 061-754-5027

     2.   호남식당: 서울 마포구 삼개로 28-3 / 02-719-1743

     3.   우리옥: 인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 184 / 032-934-2427

     4.   황금콩밭: 서울 마포구 굴레방로1길 6 / 02-313-2952

     5.   욕쟁이 할머니집: 경기 포천시 소흘읍 죽엽산로 425 / 031-542-3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