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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카타콤바 ‘배론성지’의 거룩한 가을 산책길

예로부터 충청북도 제천에서 서울로 가려면 ‘울고 넘는 박달재’라는 애절한 노래가 지어진 고개를 넘어야 했어요. 이 관행길은 해발 453m, 길이 500m의 박달재를 지나는데요. 박달재는 크고 작은 연봉이 사면을 에워싼 첩첩산중으로 험준한 계곡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곳은 산세가 깊어 구한말 박해받던 천주교인들과 봉기를 일으킨 의병의 본거지가 되었어요.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 단풍이 무르익어가는 시월, 뭉클한 역사 이야기와 함께 박달재 아래 배론의 가을 절경 속을 산책해 볼까요?

 

# ‘한국사의 그 터’, 박달재 산골짜기

1987년 역사학자 최영희 선생이 쓴 『한국사 기행 그 터』에 나오는 제천의 배론 천주교 성지와 장담의 자양영당에 관한 글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상한 일도 있다. 19세기 한국의 사상과 정치의 갈등이 충청도 제천군 박달재 산골짜기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박달재 마루턱에서 제천을 향해 왼쪽으로 10리에 있는 배론에서는 골수 천주교인들이 숨어 있었고 오른쪽 10리에 있는 장담에서는 골수 위정척사론인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상대를 사특한 것으로 규탄하여 타협할 수 없는 극과 극의 양극이 시기의 차이는 있었으나 박달재를 사이에 두고 산골짜기에 자리잡게 된 것은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사교로 몰린 천주교인들은 나라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아야 했고, 주자학의 전통을 이은 위정척사론인들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세속을 떠나 그 전통성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였다.”

 

배론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가 쓰인 곳이고, 장담 마을은 1895년 을미의병운동의 첫 봉기가 일어난 곳이라니 그야말로 이곳은 ‘한국사의 그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가을 단풍 물든 배론성지의 열 일곱 순례길

충청북도 제천시 서쪽, 남북으로 흐르는 제천천을 건너 배론성지길로 접어들면 양쪽으로 붉게 물든 대왕참나무 길이 이어져요.

 

박달재 북쪽 산세를 이루는 주론산의 정동 산자락, 봉양읍 구학리 일대에는 1800년대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온 천주교인들이 모여 교우촌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화전과 옹기를 구워 생활하며,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어요.

 

▲ 배론성지 순례길

이곳 산골짝 지형이 ‘배 밑창’을 닮아서 ‘배론(舟論)’이라 불렀는데요. 여기가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중요한 장을 채우고 있는 '배론성지'입니다. 2020년 완공된 '은총의 성모마리아 기도학교'를 거쳐 제천천의 상류인 두학천을 건너면서 열일곱 구역으로 이어진 순례길이 시작돼요.

 

▲ #1. 마음을 비우는 연못

영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짙은 연못과 두 팔 벌린 예수상이 방문객을 맞이해요. 각기 다른 빛깔로 물든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느티나무가 연못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가을 정취가 물씬 느껴져요. 연못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 위에 올라서면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답니다.

 

‘마음을 비우는 연못’은 이름 그래도 마음을 비워 깨끗해진 마음을 가져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연못가 벤치에 앉아 가을 풍경을 음미하며 잠시 일상에서 쌓인 더께를 벗어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 #2. 무영 순교자의 묘 / ▲ #3. 성 요셉 성당

예수상 뒤에는 무명 순교자의 묘가 조성돼 있고, 두학천을 따라 느티나무 길을 거슬러 오르면 개량 한옥 양식으로 지은 성 요셉 성당이 나와요. 성당 앞 감실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 #4. 진복문 / ▲ #5.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현양탑

진복문을 오르면 220여 년 전 신앙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공간이 펼쳐져요. 현양탑 앞에서 교우촌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6. 옹기가마 굴

현양탑 오른쪽에 옹기가마 굴이 있어요. 옹기는 박해를 피해 들어온 천주교인들의 생계 수단이었어요. 이들 중에는 옹기장수와 행상들도 있었는데요. 이들은 옹기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교우촌 사이의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면서 안전유지에 큰 기여를 했답니다.

 

옹기가마에 불을 지피며 믿음, 희망, 사랑 '향주삼덕'의 불을 키워간 선조들의 신앙의 불꽃을 상상해 볼 수 있어요.

 

# ’황사영 백서 사건’과 한국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당’

▲ #7. 황사영 백서 토굴

옹기가마 굴 옆에는 가경자 황사영이 신유박해 이후 피신한 토굴이 있어요.

 

황사영은 열여섯에 과거에 급제하여 장래가 촉망되던 소년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로 다산의 셋째 형 정약종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웠어요.

 

1800년 천주교는 교인 1만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어요. 천주 신앙의 전파를 경계하던 공서파의 성토와 상소가 불같이 일어났죠. 그러나 정조는 “바른 유학을 크게 천명한다면 사설은 일어났다 가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라며 적극적으로 박해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천주교를 묵인하던 남인 시파의 재상 채제공이 1799년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인 1800년 정조마저 타계하자 정계의 주도세력이 벽파로 바뀌면서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어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배론으로 피신 와 8개월 동안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 속에 머물렀답니다. 이 토굴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비극을 호소하는 밀서를 써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로 해요. 가로 62cm, 세로 38cm인 작은 비단천 위에 세필로 빼곡하게 122행, 13,311자를 쓴 긴 사연이었답니다.

 

백서의 전달은 해마다 북경 동지사 일행에 끼어 들어오는 옥천희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북경에서 의주로 돌아오는 길에 옥천희는 체포되고 말아요. 이후 황사영도 체포되어 1801년 11월 5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어요.

 

황사영의 백서에는 박해를 막고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천주교를 포교할 방안을 담았지만, 외세의 군대를 이용해 조정을 뒤집자는 반란 요소가 들어있어 이후 천주교 박해는 더욱 거세지는 빌미가 되었죠.

 

이 때문에 황사영은 순교자이면서도 시복시성이 오랫동안 미뤄지다가, 2013년 교황청 시성성에서 가경자 전단계인 ‘하느님의 종’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 백서 원본은 1925년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의금부에서 입수하여 교황청에 보냈고,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 #8. 황사영관

황사영 토굴 앞으로는 세라믹 공예 성인화 상설 전시실이 있는 황사영관이 자리 잡고 있어요. 성인화에 담긴 성인들의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 #9. 성 요셉 신학당

황사영 토굴 옆에는 조그마한 초가집 한 채가 있어요. 바로 한국 교회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입니다.

 

신유년 피바람이 일어난 지 50여 년 후 배론에 이방인들이 찾아와요. 프랑스 외방선교회 선교사 메스트로 신부가 자신의 집을 봉헌한 교우촌 회장 장주기 요셉의 도움을 받아 1855년 황사영 토굴 근처에 성 요셉 신학당을 설립했어요.

 

이듬해 푸르티에 신부가 교장으로, 프티니콜라 신부가 교수로 재직하여 전공을 신학과와 라틴어과로 나누었어요. 철학과 수사학, 동물, 식물, 지리학과 의술과 같은 과학지식과 일반상식도 가르쳤는데요. 성 요셉 신학당은 당시 조선에서 유일했던 서양식 근대 학교 역할을 했어요. 두 서양 신부는 신학생들을 교육하면서도 교리서의 번역과 '라틴어-한국어-한문' 사전을 만들었죠.

 

11년 후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8명의 신학생을 배출했지만,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 3월 2일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체포되어 3월 11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면서 신학당은 문을 닫습니다.

 

장주기 요셉은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3월 30일에 순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때 흰 무지개 다섯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져요.

 

하지만 이들의 유산은 20여 년 후 원주시 부흥골 임시 신학교를 거쳐,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원, 오늘날 가톨릭대학교 신학부로 이어져요. 배론 산골짜기 초가집 신학당이 우리나라 가톨릭 신학교의 기원이 된 것이죠.

 

성 요셉 신학당 방안에는 무릎을 꿇거나 꼿꼿이 서서 천주학을 공부하던 당시 신학생들의 모형이 재현되어 있어요.

▲ #10. 십자가의 길

성 요셉 신학당 뒤편 양업 광장에서부터 ‘십자가의 길’이 시작돼요.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14곳으로 나누어 묵상하는 장소입니다.

#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11. 성직자 묘지 / ▲#12.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지

십자가의 길은 두 곳의 묘지를 지나는데요. 성직자 묘지에는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지학순 다니엘 주교와 교구 사제들이 잠들어 있어요. 원주가 유신 항쟁의 진원지이자 민주화 투쟁의 성지가 된 것은 지학순 주교의 영향이 컸어요.

 

또 하나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지입니다. 최양업 신부는 우리나라에서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서품을 받은 천주교 사제예요. 그의 아버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이고 어머니는 이성례 마리아 복자입니다. 두 분 모두 기해박해로 선종했어요.

 

열다섯 최양업은 서울에서 1836년 12월 김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어요.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교육을 받았고, 1849년 4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어요.

 

그는 13년 만에 귀국해 11년 6개월 동안 하루 100리, 매년 2,800km를 걸어 다니며 산간 오지에 있는 교우들과 함께 성사를 집전했어요. 그가 사목하는 구역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5도로서 6천여 명의 신도들과 127개의 공소가 있었습니다.

 

▲ #13. 성모동굴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동시에 신분제 폐지 등을 주장하며 사회개혁을 위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어요.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가던 중 과로와 장티푸스로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그해 11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신학당이 있던 배론에 묻히게 되었죠.

 

베르뇌 주교는 추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어요. “그의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판단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구원에 이끌기 위해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2016년 4월 26일 교황청 시성성은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가경자’로 선포하였어요.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 시복 반열에 오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랍니다.

 

십자가의 길 끝에는 자애로운 성모를 모신 성모동굴이 방문객의 걸음을 잠시 붙들어요.

 

▲ #14. 로사리오 길

다시 두학천을 건너오면 배론성지 서쪽으로 로사리오 길이 시작돼요. 이 길은 너른 잔디 언덕을 거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 공원과 기념 성당으로 이어집니다.

 

'로사리오'는 장미 정원을 뜻하는 라틴어 '로사리움'에서 유래했어요. 성모의 품속 같은 이 길은 천주교인들이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는 길이랍니다.

 

▲ #15. 최양업 토마스 신부 조각 공원

조각 공원에서는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볼 수 있어요. 마카오 유학 시절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는데요. 1839년 7개월 동안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닐라 모처로 피신했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에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마닐라에서 30km 떨어진 수도회 농장에서 생활했다고 하는데요. 짧은 기간이지만 아직 십 대를 못 벗어난 소년이 낯선 열대기후에서 고생한 모습이 떠올라요.

 

필리핀에 머물던 시절 최양업 신부의 가족은 기해박해로 풍비박산이 나고 자신을 신학생으로 선발한 피에르 모방 신부마저 이로 인해 순교하고 말았죠. 가족과 스승을 잃은 슬픔이 컸지만 후에 홍콩에서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어요.

 

사제 서품을 받기도 전에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25세의 나이에 순교하자, 조선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계속하다 서품을 받은 해 12월 극적으로 귀국했어요. 오랜 박해 때문에 신도들의 고해성사가 밀려 있던 데다가 신부 수가 부족해 그는 도보 사목 생활을 줄기차게 이어가요. 그뿐만 아니라 [천주성교성과] 기도서를 번역하고, [서정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의 천주가사를 저술하기도 했어요.

 

최양업 신부는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이런 말을 남겼어요.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열심인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죄악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돼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첫 사제 김대건 신부를 '피의 증거자',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를 '땀의 증거자'로 일컬어요.

 

▲ #16. 최양업 토마스 신부 기념 성당

배론의 지형을 본 떠서 배 밑창 모양으로 지은 최양업 토마스 기념 성당은 구원의 방주를 상징해요. 성당 입구 전시실에는 최양업 신부가 교우들의 신앙을 위해 집필한 <천주가사>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묵상할 수 있는 성경 이야기 세라믹 공예화가 있고, 성당 내부에는 제대, 감실, 성인들의 유해가 있습니다.

 

황사영 백서 사건부터 성 요셉 신학당과 최양업 신부의 활발한 전교 활동으로 알려진 배론성지는 조선 초기 열악했던 천주교인들의 사정과 조선에서 이뤄진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 #17. 인생 미로

순례길의 마지막은 인생 미로입니다. 배론성지 지킴이는 여기에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이라고 적어 놓았어요.

 

"당신은 순례자, 빨리 목적지에 다다르고 싶어 마음이 급하지요. 인생길은 순례의 길, 서두르지 마십시오.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에서 40년을 돌아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기도하면서 미로를 따라 걸어 보십시오. 인생 여정에는 동서남북 사해팔방 춘하추동 생로병사 유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습니다. 어느 과정도 생략할 수 없고 모두 거쳐야만 목적지에 이릅니다. 인생 여정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묵묵히 걸으면 반드시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인생 같은 미로 길을 걸으며 자신이 살아온 길, 가야 할 길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미로는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 내 마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나의 참된 모습을 상징해요. 인생 미로의 중앙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습니다.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입니다"

 

# 제천 배론성지 여행 팁

배론은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이 있고, 김대건 신부를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어 전국 각지의 성지순례 천주교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배론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와, 전통과 충돌한 지식인과 민초들의 이야기를 그린 김훈의 역사소설 『흑산』의 주요 배경이기도 해요. 또 신경림의 시집 『새재』에도 배론의 역사를 다룬 시 '다시 남한강 상류에 와서'가 수록돼 있어요.

 

배론성지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어요. 원주에서 가자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고, 남쪽으로 가자면 충주에서 흥미로운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해요.

 

제천 배론성지

•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 방문시간 : 매일 09:00 - 17:00

• 입장료, 주차장 : 무료

• 문의 : 043-651-4527

 

▲ 배론성지 출구에 있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록

초가을까지 더위가 이어졌어요. 이제 일교차가 제법 나면서 아침저녁이면 가을이 깊어져 간다는 것을 느낍니다. 배론성지 출구에는 최양업 신부의 어록이 적혀 있는데요. ‘분노의 그릇이 되지 말자’는 글귀가 눈에 들어옵니다. 일상에서 쌓인 ‘화’가 많다면 배론성지의 순례길을 산책하며 가을 절경 속에서 ‘분노’를 깨끗이 씻어내고 ‘기쁨’을 마음 가득 채워 돌아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