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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 먹거리가 풍부한 부산 영도 탐험기

시야에 꽉 차도록 탁 트인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눈부신 햇살, 해진 후에는 부산항에 입항하기 위해 떠 있는 상선들의 황홀한 불빛… 바다와 절벽, 작고 작은 집들이 꿈길처럼 맞물리며 이어지는 흰여울마을은 사람들이 ‘부산의 산토리니’라고 부르는 동네예요. 하지만 이곳에는 한국전쟁 때 ‘피란 수도’ 부산으로 몰려든 피란민들이 판자촌을 이뤘던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답니다. 서로 의지하고 포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길목마다 펼쳐지는 절경에 발길이 멈춰지는 부산 영도의 볼거리, 먹거리를 알려 드릴게요.

 

# 바닷가 절벽까지 밀려온 피난민촌

▲1953년 4월 부산항과 영도의 모습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부산진에 들어서면서부터 기차는 바다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하여 몸을 뒤로 뻗대었다. 초량역에서 본 역까지는 거의 한 걸음을 재듯 늑장을 부렸다. (중략) 끝의 끝, 막다른 끝, 거기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김동리 작가는 1·4후퇴 때 피난 간 예술인들을 다룬 단편 『밀다원 시대』에서 부산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부산은 한국전쟁 때 전세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면서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였어요. 인구 40만이었던 부산은 서울과 이북, 각지에서 내려온 피난민들로 100만 도시로 급팽창했답니다.

 

한국전쟁 당시 정부와 부산시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부산 남구 적기에 있던 소 수출검역소와 영도 해안가, 청학동, 남구 대연고개, 서구 남부민동과 괴정 당리동 등 40여 곳에 수용소를 만들었어요. 급조한 시설의 수용 규모는 7만 명에 지나지 않아 나머지 피난민들은 국제시장 주변 용두산과 복병산 기슭, 대청동, 영주동, 초량동, 수정동, 범일동과 영도 바닷가 주변인 태평동과 남항 근처 충무동 해안가에 판잣집을 지어 나갔어요.

 

정부 기록에 따르면 1953년 7월 판잣집 수는 2만 8619호로 영주동 산기슭에 1000여 호, 영도대교로 해안가에 700여 호, 보수동에 600여 호, 송도에 300여 호, 국제시장에 1200여 호 등이 있었어요. 피난민들은 위로는 산꼭대기까지, 아래로는 바닷가 절벽 끝까지,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끝까지’ 밀려 나갈 수밖에 없었죠.

 

▲ 절영해안산책로로 이어진 가파른 계단

어느 곳 하나 힘들고, 어렵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영도 봉래산 남서쪽 기슭 절벽 위에 세워진 영선2동 일대 판자촌은 그야말로 ‘막다른 끝’까지 밀려 나간 최악의 난민촌이었어요. 일제강점기 공동묘지였던 이곳은 ‘피난 온 사람들이 식구 수대로 가마니를 받아서 깔면 거기가 내 집이 됐던’ 피난민촌으로 바뀌었답니다.

 

지금도 난간을 붙들지 않고는 내려가기 힘든 가파른 경사지 절벽 위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판잣집에 겨울이면 거센 바닷바람이 그대로 불어닥쳤어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절벽 끝에 두 사람이 겨우 비켜 다닐 수 있게 나 있는 좁은 골목길 하나가 전부인데, 당시 이 길은 영도다리에서 태종대로 가는 유일한 진입로였습니다. 그 길을 따라 판잣집이 붙어 서 있어 ‘흰여울마을로 도망가면 찾지도 못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복잡하고 험한 동네였어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이곳에는 한 집 두 집 판잣집을 헐어 내고 방 한 칸짜리나 두 칸짜리 벽돌집이 들어서면서 서민주택가로 바뀌어 갔어요.



# 눈 내리듯 흘러내리는 물줄기 ‘흰여울’

피난민 판자촌이 들어선 뒤 60년 동안 가난을 달고 살아왔던 이곳은 2011년 12월, 도로명 주소 시범사업과 도시재생사업으로 공동체 ‘흰여울문화마을’로 거듭났어요. 그전까지 폐가와 빈집들이 생기면서 슬럼화하고 있던 곳에 영도구청이 빈집 3채를 사들여 리모델링해 지역 예술가의 작업 공간으로 제공하면서 문화공동체 마을 만들기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죠.

 

누추한 골목길에 ‘흰여울길’이란 이름을 붙이고 낡은 담벼락에 벽화들을 그려 넣고, 서양화가, 사진작가, 목공예나 도자공예가들이 터를 잡고 앉자 관광객들이 찾아 들었어요. 영도구청이 테마형 담장과 친환경 골목길, 안내센터와 전망대를 만들고 급경사로에 계단과 데크길을 설치해 2020년 11월 사업을 마무리했습니다.

 

‘흰여울’은 원래 ‘물이 맑고 깨끗한 여울’이란 순우리말인데, 이곳에서는 봉래산에서 내려오는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빠르게 바다로 굽이쳐 내리는 모습이 흰 눈 내리듯 한다고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흰여울마을은 바다 건너편 송도해수욕장에서 건너다보이는 절경이라고 해서 ‘제2송도’로 불리기도 해요. 눈 앞에 펼쳐지는 망망대해가 가슴을 확 트이게 해줘요.

 

부산항에 들어오는 선박들이 외항에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묘박지의 모습은 영도에서만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인데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남항대교와 부산 남항이 한눈에 들어와요.

 

더구나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남항 앞바다 잔물결에 반짝이는 윤슬과 낙조가 몽환적이랍니다.



# 오션뷰 카페만 20여곳 늘어선 낭만골목

2015년 예능 프로그램에 흰여울마을이 방송된 후부터 좁은 마을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크게 늘었어요. 2018년 즈음부터는 길가의 가정집도 한 집 걸러 한 집 카페로 바뀌었죠.

 

약 1km에 걸쳐 나 있는 흰여울길에는 20여 개 카페가 줄지어 있어요. 거의 모든 카페가 가파른 절벽 위에 있어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시원한 오션뷰를 즐길 수 있답니다.

 

흰여울길은 모두 14개의 골목길로 이어져 있는데요. 골목골목 아기자기한 카페와 공방, 독립서점 등이 자리하고 있어요.

 

영도 곳곳에서는 사람들의 순수와 치열을 만날 수 있어요. 전쟁이 지나고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어려움을 이겨내며 뿌리내린 삶의 의지와 토닥이는 정이 동네와 사람들에게서 그대로 느껴진답니다.

 

흰여울마을에서는 피란 길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이르러서도 의연히 일궈낸 삶의 모습, 사람들의 강건함이 주는 울림이 우리 일상으로 전해오는 느낌이 들어요.



# 부산 토박이들이 인정하는 진짜 원조, 삼진어묵

부산 영도에서 먹거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묵이에요. 처음 어묵이 생겨난 곳이죠. 배고프던 시절 따뜻한 어묵 국물은 추위와 허기를 달래는 서민들의 주요 먹거리였죠.

 

부산 어묵의 역사는 개항과 더불어 일본인이 부산에 대거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10년 개장한 부평동 시장은 전국 최초의 공설시장인데요,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시장』이란 책자에 '부평시장은 쌀, 어묵, 채소, 청과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답니다. 부산어묵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전쟁 직후, 일본에서 어묵 제조 기술을 배워 온 박재덕 씨는 부산 영도구 봉래시장 입구의 판잣집을 빌려 어묵 제조를 시작했어요. 주변에 인구가 많기도 했거니와 지금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부산 최대의 수산 시장이 있어 재료의 수급이 쉬웠기 때문이었죠.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면서 자그마한 어묵 가게는 호황을 누렸어요. 덕분에 조그만 판잣집에서 시작한 어묵 공장은 '삼진식품가공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답니다. 현존하는 어묵 제조 업체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었어요.

 

당시 삼진어묵은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의 단백질 공급원이자,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서민들의 슬픔을 달래주는 음식이었어요.

 

▲ 삼진어묵 베이터리(영도 본점)에는 삼진어묵의 변천사를 알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1940~50년대에 어묵은 맷돌에 생선을 뼈째 갈고 기름 솥에 튀기는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식용 기름에 튀긴 어묵은 고급품으로 시내 요릿집에 납품되었고, 싼 어묵은 고래기름이나 전갱이 기름으로 튀겼답니다. 밀가루가 비싸다 보니 콩비지를 섞기도 했는데요. 콩비지를 섞은 어묵은 퍼석퍼석해도 '고소한 맛'이 있었어요.

 

삼진식품은 부산지역 어묵 업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60년대 초 어묵 수요가 많이 늘어나자 삼진식품에서 기술을 배운 기술자들이 대거 독립하였고, 이때 환공어묵, 영진어묵 등이 만들어졌어요.



# 3대째 가업을 이어온 삼진어묵

선대부터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삼진어묵은 어묵의 종가, 어묵의 원조로 통해요. 부산 토박이들이 인정하는 진짜 ‘원조’ 어묵집이죠.

 

당시 대부분의 어묵 제조 과정이 비위생적이었고 어묵은 불량식품이라는 소비자의 인식이 지배적이었는데, 그래서 삼진어묵은 누구보다 공장의 위생 상태를 신경 썼어요. 작업장과 작업자 개인위생 상태는 물론 채소류 등 각종 부재료까지도 일자별로 구분해 신선도가 떨어지는 재료는 제품에 사용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했답니다.

 

삼진어묵이 타 업체와 차별화되는 또 다른 점은 숙련된 수제 어묵 장인을 여러 명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어묵 장인들은 평균 근속연수가 20년 이상으로 가장 오래된 장인은 40년이 넘어요.

 

 

삼진어묵은 3대째에 접어들며 이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가 이어온 ‘맛’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전략으로 나섰어요. '삼진어묵 베이커리'를 만들어 어묵을 빵처럼 편안히 고를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결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답니다.

 

2013년 12월 국내 최초로 시작한 어묵 제과점 사업을 등에 업고 2013년 82억이던 삼진어묵의 매출은 2015년 500억 원, 2018년 960억 원을 넘어서며 5년 만에 10배 이상 늘었어요. 직원 수도 늘어나 550명을 넘어섰죠.

 

이 같은 어묵 열풍에 삼진어묵 영도 본점은 주말 하루 1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연 1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되었어요. 오픈 키친 형태로 구매자가 생산되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보면서 제품을 구매할 수 있고, 2층 어묵 체험관은 한 달 기준 2,500여 명이 방문해 어묵 체험에 참여하고 있어요.

 

삼진어묵의 다양한 어묵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은 다름 아닌 ‘어묵 고로케’입니다. 부드러운 어육과 정성껏 으깨 넣은 고구마가 어우러져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낸답니다. 어묵 크로켓 박스는 놓이는 족족 금세 동이 나요.

 

삼진어묵 베이커리가 있는 봉래동 본점 자리는 1953년 열었던 판잣집 공장이 있던 자리예요. 허름한 판잣집에서 시작한 어묵집이 이제는 유명 백화점에 입점하고 해외 지점을 내는 ‘브랜드’가 됐어요.

 

삼진어묵은 봉래동 일대를 1950년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해 '어묵 타운'으로 만들 계획이에요. 여기에 어묵 박물관과 어묵 연구소를 짓고 어묵 장인 제도를 만들어 아버지뻘 옛 장인들을 불러 모으겠다는 생각입니다.

 

# 영도 흰여울마을, 삼진어묵 베이커리 방문 팁

영도 흰여울마을은 부산역에서 4.7km 거리로 매우 가까워요. 택시로 15분 이내, 82번, 85번, 508번 버스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자갈치시장과 남포동과 이어진 지하철 1호선 남포역에서도 6번, 7번, 9번, 71번, 82번, 85번, 508번으로 갈 수 있답니다.

 

흰여울마을에서 삼진어묵 베이커리(영도 본점)까지는 2.6km 거리로 남항을 내려다보며 산복도로로 30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고, 6번, 9번, 70번, 71번, 82번, 508번 버스나 영도구2번, 영도구5번 마을버스를 이용할 수 있어요.

 

삼진어묵 베이커리(영도 본점)

 

• 영업시간

매일 09:00 - 19:00

• 주소

부산 영도구 태종로99번길 36

• 문의

051-412-5468

 

흰여울마을을 방문할 때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어요. 실제 주민들이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카페나 상점이 아니라면 함부로 문을 열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아야 하고, 또 되도록 조용히 산책해야겠죠.^^

 

여행은 서로 다른 삶들이 만나 교감하는 기회가 될 때 일상을 바꾸어 줍니다. 부산 영도 흰여울마을은 '그곳에는 사람과 삶이 있다'라는 생각이 드는 여행지예요. 나의 특별하고 완벽하게 즐거운 하루보다, 나와 다르게 살아온 삶에 대해 열린 마음을 중심에 둔다면 더욱 즐겁고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거예요. 아기자기하고 예쁜 카페와 서점, 소품숍들이 바다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흰여울마을에서 치열하면서도 따듯한 삶의 흔적을 찾아보기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