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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진미, 산뜻한 봄나물이 온다

글_박정배(음식 칼럼니스트)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무료한 입맛을 달래줄 봄나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쌉싸래한 향을 가득 머금은 봄철 햇나물은 예부터 ‘천하의 진미’로 손꼽힌다. 산뜻한 봄나물로 나른해진 몸을 깨워 보자.

옛사람들은 ‘봄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東風)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만큼 거센 추위를 녹이는 봄바람의 위세는 대단하다. 따뜻한 바람이 불면, 작은 연두빛 새싹들이 검고 딱딱한 땅을 깨고 나온다. 어느 덧 집 앞 마당까지 불쑥 들어선 봄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밥상이다.



과거 왕가(王家)에서는 입춘(立春)에 봄을 상징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24절기의 시작을 축하했다. 봄을 상징하는 음식은 쓰고 매운 맛이 나는 다섯 가지 봄나물로, 오신채(五辛菜)라 불렸다. 이를 밥에 비벼 먹으면 비빔밥의 일종인 오신반(五辛飯)이 된다. 오신채에 속하는 나물은 시대와 지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움파(배어낸 줄기에서 다시 난 파), 산갓, 승검초, 미나리싹, 무싹을 이르거나 또는 파, 마늘, 달래, 무릇, 부추처럼 비교적 자극이 덜한 나물 중 골라 무쳤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1849년) 입춘조(立春條)에는ᅠ‘총아(葱芽·움파), 산개(山芥·멧갓), 신감채(辛甘菜·승검초) 등 햇나물을 눈 밑에서 캐내어 임금께 진상한다.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다섯 가지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다’고 나온다.



달래를 비롯해 마늘, 부추, 대파, 쪽파, 양파 등 파속(屬) 식물은 오래전부터 조미채소로 사용해 왔다. 재료 자체의 맛도 훌륭하지만 음식의 풍미를 끌어올리는 향신료로서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다. 특유의 향은 봄나물에 함유된 이황화물 같은 물질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러한 황 성분은 살균작용과 암 예방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달래는 콜레스테롤과 혈당 감소, 항산화기능 등이 있어 오래전부터 약용 식물로도 쓰였다.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쌉싸래한 봄나물의 향은 입맛을 돋우는데 그만이다.



나물은 크게 사람이 직접 씨를 심고 재배한 채소와 야생에서 자라는 야채로 나뉜다. 야채는 다시 산에서 나는 산채(山菜·산나물)와 야채(野菜·들나물)로 구분할 수 있다. 조리 방법에 따라 생으로 먹는 생채(生菜)와 데치거나 국에 넣어먹는 숙채(熟菜)로도 나뉜다. 지금은 제대로 된 산채 나물이 귀한 대접을 받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나물은 말그대로 '촌가 솥의 식욕을 채워 주는'(동문선, 1478년) 흔한 음식이었다. 조선 후기에 갑자기 나물의 종류가 급증한 시기가 있는데, 이는 오랜 기근과 식량 부족으로 산나물 채취가 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록된 구황식품 415종 중 322종을 차지했으니, 그야말로 나물로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일제강점기에는 '기근에 산에도 들에도 나물 캐는 사람뿐'(1923년 3월 21일, 조선일보)이라는 기사가 나고, 이후에도 나물을 캐다가 사냥꾼의 총에 맞거나 뱀, 호랑이 등에 물리는 사고가 흔했다.



봄나물이 유독 맛있는 이유는 아마 즐거운 노동 이후 즐기는 음식이라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따뜻한 봄 햇살을 즐기며 산으로, 들로 다니는 나물 캐기는 봄철에만 즐길 수 있는 야외 나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금계집>(錦溪集)에서 '봄 산에서 나물 캐니 소 잡는 것보다 낫네'라고 말할 정도로 나물 캐기를 좋아했다. 미식가로도 유명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경기도 광주 천진암(天眞菴)에 사흘간 머물며 냉이, 고사리, 두릅 등 산나물 56종을 먹고 즐긴 것을 기록으로도 남겼다.


그렇다면 이렇게 캔 나물은 어떻게 조리해서 먹는 것이 가장 맛있을까. 고유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조리를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조선요리제법>(1921년)의 ‘나물 무치는 법’에는 '풋나물은 봄에 먹는 것이니 무엇이든지 잠깐 데쳐 넣어 꼭 짜가지고 간장이나 또는 고추장을 치고 기름과 깨소금 쳐 무쳐 낸다.'고 써있다. 가장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봄나물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국에 넣어 먹는 것이다. <조선요리제법>에서도 냉이국은 정이월(양력 3월) 음식으로 나올 정도로 쌀밥과 봄나물은 최고의 봄철 상차림이다.


진한 육수에 된장과 쑥을 함께 넣고 끓이면 봄향기 그득한 쑥된장국이 완성된다. 해산물이 풍부한 남쪽에서는 도다리를 넣어 도다리쑥국으로 봄을 맞기도 한다. 살이 제대로 오른 도다리에 새파란 어린 봄쑥을 푹 끓여낸 개운한 국물을 한 사발 먹고 나면 마치 보양식을 먹은 것처럼 든든하다. 냉이와 된장, 고추장과 쇠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도 일품이다. 겨우내 춥고 메마른 대지의 영양분을 흡수한 냉이의 쌉쌀한 맛은 구수하고 달달한 된장, 칼칼한 고추장을 만나 식욕을 자극하고 나른한 몸을 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