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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문화가 되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술은 무엇일까. 바로 ‘맥주’와 ‘소주’다. 두 술은 인생의 희로애락과 함께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맥주와 소주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조금 다르다. 대개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 “맥주 한 잔 쏠게”를 외친다. 반면에 삶이 힘들거나 고달플 땐 “소주 한 잔 하자”고 말한다. 맥주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맥주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해도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술’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맥주시장을 돌아보면


국내 맥주시장은 약 1세기 동안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가 장악했다.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양강(兩强) 체제는 2014년 롯데주류가 시장에 진입하면서부터 80년 만에 바뀌었다. 이처럼 대기업 독과점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리나라의 주류정책 때문이다. 국내 맥주시장은 진입 장벽이 지나치게 높다. 주세법상 맥주를 제조하려면 5만리터(L) 이상의 저장고를 갖춰야 하는 등 시설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주류업계의 대표적 규제인 ‘일괄 주세율’도 문제가 된다. 현행 주세법은 맥주 출고량과 관계없이 출고가의 72%를 주세로 일괄 부과하고 있다. 100리터를 생산하는 대기업이나 1리터를 생산하는 소규모 맥주업자 모두에게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대기업 맥주가 세금을 덜 내는 구조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소형 브루어리(Brewery, 맥주 양조장)들이 생겨났지만 이들은 얼마 못가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10년 뒤, 한국·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계기로 국내에 유럽 맥주가 대거 수입됐다. 해외여행 대중화로 해외 맥주를 맛본 소비자의 입맛은 높아졌다. 주세법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현재 국내에서는 약 50여 개의 작은 브루어리와 브루펍(Brew pub, 맥주를 직접 빚어 파는 펍)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있다.



수입 맥주, 수제 맥주… 소비자의 눈이 높아지다


지난해 국내 수입 맥주 매출은 5000억원대로 파악됐다. 시장 점유율 3위인 롯데주류의 매출 규모(약 950억원)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는 시장 점유율 2위인 하이트진로의 매출(약 8200억원)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수입 맥주가 독과점적 한국 맥주시장 구도를 뒤흔들고 있다. 한국 맥주 값과 별 차이 없는 ‘4캔에 1만원’이란 가격도 소비자들 발길을 잡기 충분했다. 지난해 벌어진 ‘맥통법(수입 맥주의 할인판매를 제한하는 제도)’ 해프닝도 같은 맥락이다. 


수입 맥주끼리의 경쟁도 치열하다. 현재 최소 120여개 맥주 수입회사가 400~500종의 수입맥주들을 국내에 들여와 파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 업체는 낮은 온도에서 발효시킨 라거 맥주만 주로 팔았으나, 수입 업체들은 상온에서 발효하는 에일, 맥아를 태워 발효시킨 흑맥주, 밀로 만든 밀맥주들을 들여왔다. 새롭고, 맛있고, 다양한 맥주를 찾고 있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반영한 것이다.



기존 맥주 수입국 1위는 아사히, 기린, 삿포로로 대표되는 일본이었다. 하이네켄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힘을 입은 네덜란드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수도원 맥주’와 과일 맥주 ‘람빅’으로 유명한 벨기에, 라거 강국인 독일, 필스너의 본고장 체코, 다양한 크래프트 비어(수제 맥주)를 보유한 미국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크래프트 비어란 양조장에서 고유의 비법을 통해 만들어 개성 있는 맛과 신선함을 살린 맥주다. 최근 몇 년 동안 크래프트 비어의 인기는 유럽의 전통 맥주시장까지 흔들고 있다.



수입 맥주 소비량이 늘고 있는 데는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는 인식도 한몫한다. 우리나라 맥주가 이러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맥아 함량이 낮고 쌀, 옥수수 전분 등의 부산물을 섞어 만든 대기업 맥주가 전체 시장을 선도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맥주 소비자의 고급화된 입맛에 부합하기 위해 올 몰트 맥주(All malt, 맥아·물·호프 이외에 다른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100% 보리 맥주)들이 생산되면서 국산 맥주의 품질도 상당히 높아졌다.



맥주, 이왕이면 맛있게 마시자


맥주는 오감으로 느끼며 마시는 기호음료다. 병이나 캔에 담긴 상태로 마셔서는 맥주의 참맛을 느낄 수 없다. 맥주의 종류마다 정교하게 설계된 전용 잔이 존재하는 이유다. 입구가 넓은 잔은 맥주 향이 넓게 퍼진다. 화려한 향의 맥주는 주둥이가 넓은 잔, 복잡한 향의 맥주는 좁은 잔이 알맞다. 차가워야 제 맛인 맥주는 두꺼운 잔이 좋고, 향이 풍부한 맥주는 온도가 쉽게 올라가도록 얇은 잔이 어울린다. 전용 잔을 구비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일반 컵에라도 따라 마시자. 


맥주를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는 깨끗한 잔부터 준비해야 한다. 우선 잔을 45도로 기울인 다음 맥주가 잔의 림 부분(둥근 날)에 닿을 때까지 따른다. 그리고 맥주잔을 바로 세워 거품 층을 만든다. 맥주에서 거품은 매우 중요하다. 거품 아래 액체를 맛있게 보존하기 위해서다. 맥주 거품은 맥주의 탄산이 날아가는 것과 산화를 막는다.



맥주와 음식의 페어링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비어-푸드 페어링을 생각할 때는 주인공이 맥주인지 요리인지를 먼저 따져보자. 맥주가 주라면 맥주의 맛과 향을 더욱 살려주되 맥주의 풍미를 덮지 않을 메뉴로 선택하면 된다. 비어-푸드 페어링을 위한 맥주의 성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쓴맛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덜고 간이 강한 음식의 짠맛을 완화해 주며, 향신료의 향이나 매운맛과 조화를 이룬다.

 단맛

 음식의 쓴맛, 매운맛, 신맛을 완화시키며 단맛을 증폭시킨다.

 신맛

 기름진 음식의 느끼함을 덜고 새콤함을 더한다.

 탄산

 맥주의 경쾌한 탄산감은 음식의 향을 증폭시킨다. 매운 음식의 열을 식히며, 느끼하거나 비린 음식과 함께 할 때 입안을 

 헹궈주는 역할을 한다.

 알콜

 미각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며 기름진 음식과의 페어링에서 느끼함을 상쇄해준다.



맥주의 종류와 용어 설명


맛도 다양하고 브랜드도 다양한 맥주는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맥주는 크게 발효 방법, 알코올 농도 및 품질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보통은 알코올 농도나 품질보다는 발효 방법에 따라 맥주를 나눈다. 맥주는 효모 종류에 따라 하면발효 맥주와 상면발효 맥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면발효 맥주는 발효 중 밑으로 가라앉게 되는 효모를 사용해 저온에서 발효시킨 맥주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라거 맥주(Lager Beer), 드래프트 맥주(Draft Beer)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면발효 맥주는 10℃ 정도의 저온에서 발효를 하고, 여과가 쉬우며 깨끗하고 부드러운 맛과 향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세계 맥주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필스너(Pilsener)는 체코에서 만들어지는 라거(Lager)의 일종이다. 19세기 중반 체코 플젠(Pilsen) 지역에서 만들어져 필스너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맥주는 알코올 함량은 낮으나 호프를 많이 첨가해 쓴맛이 강하고 황금빛을 띠는 게 특징이다.



상면발효 맥주는 발효 중 표면에 떠오르는 효모를 사용해 만든다. 하면발효 맥주에 비해 비교적 고온에서 발효시켜 제조한다. 대표적으로 에일 맥주(Ale Beer), 포터 맥주(Porter Beer)가 여기에 속한다. 상면발효 맥주는 10℃~25℃ 사이의 상온에서 발효하기 때문에 색이 짙고 강하며 풍부한 맛이 난다. 알코올 도수도 높은 편에 속한다. 에일 맥주 중에서 헤페 바이젠, 헤페 바이스, 화이트 비어, 위트 비어 등의 맥주는 보리맥아 외에 밀이 포함된 밀 맥주다. ‘헤페’는 ‘효모’란 뜻으로 여과를 하지 않아 효모가 남아있는 맥주다. ‘바이젠’은 독일어로 밀을 뜻한다. 


요즘 크래프트 맥주 중에서 가장 핫한 IPA(Indian Pale Ale)는 인도가 영국령일 때 만들어진 페일 에일 맥주다. IPA는 영국에서 인도로 맥주를 보낼 때 맥주가 상하지 않도록 호프의 함량과 알코올 도수를 높였다. 페일이란 엷은 색이란 뜻이다. 페일 에일이 만들어질 당시 영국에서 유행했던 포터 맥주보다 엷은 색을 띠고 있어 페일 에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IPA는 쓴맛이 강한 게 특징이다. 일반 페일 에일보다 붉은 빛을 띠며 알코올 도수가 높고 과일향이 진하다.



아일랜드의 기네스로 알려진 스타우트(Stout)는 우리가 흔히 ‘흑맥주’라 부르는 맥주다. ‘Stout’라는 단어는 ‘강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스타우트 맥주는 보통 알코올 함량이 8% 정도로 비교적 도수가 높은 편이다. 스타우트는 까맣게 태운 맥아를 사용해 짙은 갈색 혹은 검정색을 띤다. 이 때문에 커피나 초콜릿 같은 특유의 고소한 향을 자랑한다. 실제로 커피나 초콜릿을 첨가해 만들기도 한다.


맥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 맥주문화도 달라지고 있다. 다양한 맥주 축제가 개최되고 있으며 맥주 양조공장 체험, 수제맥주 만들기 아카데미 등 브루잉(Brewing, 양조)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특히 여가 시간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에게 ‘맥주 홈브루잉’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맥주 홈브루잉은 맥주 원액을 이용한 방법부터 곡물을 직접 분쇄해 깊은 맛을 내는 방법까지 다양하다. 홈브루잉 키트(맥주 원액, 몰트, 발효조, 페트병 등으로 구성된 세트)를 구입하면 집에서도 간단하게 라거, 에일 등의 크래프트 맥주를 만들 수 있다.



이제는 낮 시간대에 맥주 한 잔 마시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머지않아 맥주 전문점은 주점뿐만 아니라 카페와도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영국의 펍 문화처럼 우리나라에도 카페에서 즐기는 맥주문화가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나아가 보다 성숙한 음주 소비문화도 정착되리라 생각한다. 더위가 성큼 다가왔다. 이럴 때 벌컥벌컥 들이켜는 차가운 맥주만 한 즐거움도 없다. 바로 오늘,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며 삶의 청량감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