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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첩 속 음식이야기② 산나물, 들나물이 전하는 ‘봄의 맛’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화첩 속 음식이야기②

산나물, 들나물이        전하는 '봄의 맛'

By동동이

 

《한국일보》 기자였던 고(故) 홍승면 씨(1927-1983년)는 이렇게 말했다. “일제강점기, 여러 민족이 살았던 만주, 간도 지방에서 한국인을 가려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이른 봄 바구니를 끼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한국 여인들은 이른 봄에 반드시 산에 오른다. 나물을 캐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집안의 어머니, 친척 언니, 동네 동생들과 더불어 산에 오르고 나물을 캔다. 봄에 산나물을 채취하는 것은 한국인이 유일했다.                                                                   

글 | 황광해 칼럼니스트

 

 

‘공재 윤두서(1668-1715년)의 그림 중 <나물캐기>가 있다. 표현 그대로 나물 캐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산비탈이다. 비스듬한 산등성이에 아낙 둘이 서 있다.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있다. 치마는 무릎까지 올렸다. 영락없이 나물 캐는 모습이다.

공재 윤두서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다. 그의 그림이 지금도 해남의 윤씨 종가 ‘녹우당’에 남아 있는 이유다.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가 살았던 집이다.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조부다. <나물캐기>는 공재 윤두서의 그림 중에도 사실적으로 잘 그린 것으로 손꼽는다.

 

 

◀ 공재 윤두서의 손자 윤용의 작품 <나물캐는 여인>.

호미를 힘 있게 쥔 손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나물, 나물 캐기에 대한 오해는 깊다

나물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가난한 이들이 먹었다”는 것이다. 실제 가난한 이들은 나물을 먹었다. 나물은 청빈의 상징이기도 했다. 시골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면 으레 나물을 캐서 식량 대신으로 삼았다.

 

홍수, 가뭄 등으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 조선 궁중에서는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한다. 경차관의 주요 임무는 현지의 상황을 살피는 것이다. 그중 ‘구황경차관(救荒敬差官)’이 있다. 특별히 어려운 현지의 살림살이를 살펴보라는 것이다. 구황경차관의 보고서에 늘 등장하는 것이 곡식의 수확상태 그리고 나물과 도토리, 메밀 등의 수확상태다.

 

나물은 가난한 이들만 먹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아래로는 천민, 평민(常民, 상민)부터 위로는 고관대작들이나 궁중에서도 흔하게 먹었다. 국왕도 먹었고 제사상에도 올랐다. 제사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왕들의 조상을 모신 종묘의 제례다.

 

태조 7년(1398년) 3월15일(음력)의 <조선왕조실록> 제목은 한 줄이다. 내용도 간단하다. “산채를 종묘에 천신하다”는 제목 아래 기사는 “사신을 보내어 산채(山菜)를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하였다”는 것이다. 사신은 종묘에 제사 모시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을 종묘에 모셨다. 이 소중한 제사에 나물을 올렸다는 것이다.

 

▲ 나물은 청빈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고관대작들이나 궁중에서도 흔하게 먹었다.

 

우리는 산나물에 대해 ‘깊은 오해’를 하고 있다. 다른 민족들도 몇몇 산나물 정도는 일상적으로 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웬만한 것은 모두 식재료로 삼는 중국인들도 산나물을 우리처럼 먹지는 않는다. “네발 달린 것 중 책상, 하늘을 나는 것 중 비행기를 빼고 다 먹는다”고 하지만 정작 바다와 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중국인들도 해조류와 산나물은 널리 사용하지 않는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산나물에 매달리는지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다만 한국인의 밥상은 각종 나물들로 더욱 풍성해졌다.

 

 

묵나물은 묵나물 맛, 산나물은 산나물 맛

오늘날에는 산채, 야채라고 표현하지만, 이는 우리식 표현이 아니다. 산채는 맞다. 그러나 야채는 일본식 표현이다. 우리는 산나물, 들나물, 묵나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조선시대에는 산나물은 산채로, 들나물은 가채(家菜) 혹은 전채(田菜)로 표현했다. 가채는 집에서 기른 나물을 뜻한다. 밭에서 기르니 전채다. 야생들나물과 밭에서 기른 나물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던 시대다.

 

▲ 울릉도에서 나오는 나물. 이른 봄, 가장 먼저 나오는 나물로 귀하게 여긴다.

 

<해동잡록_4권>에는 “산에서 나는 나물은 모두 산나물 아닌 게 없는데, 출아(朮芽, 삽주 싹)만을 산채(山菜, 산나물)라고 하는 것은 속어로 그렇게 부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도 산나물, 들나물이 혼란스러웠다. 들나물의 일종인 배추를 두고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숭채(菘菜, 배추)를 배추[白寀, 백채]라 하여 한양(漢陽) 성문 밖에 많이 심어 이익을 본다”고도 했다. 배추는 오히려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고려시대에도 배추는 있었지만 오늘날같이 널리 사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루’라고 불렀던 상추 등이 흔한 채소였다.

 

▲ 시장에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

 

‘묵나물’에 대한 오해도 깊다. 묵나물은 ‘묵은 나물’이다. 가을까지 거둬들인 나물을 말린다. 겨울철을 지나면서 나물이 귀해지면 ‘묵나물의 계절’이 시작된다. 곱게 말린 나물을 물에 불려서 양념을 한다. 한겨울 반찬으로 이만한 것도 드물다. 묵나물의 하이라이트는 음력 정월대보름이다. 이날 여러 가지 나물을 다 내놓는다. 호박고지부터 각종 산나물, 들나물 말린 것들이 선을 보인다. 고사리, 피마자 잎 등도 보인다.

묵나물은 묵나물 나름의 맛이 있다. 흔히 ‘신선한 나물’을 최고로 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묵은 나물, 말린 나물은 본연의 맛이 있다. 잘 말리면서 숙성된 나물은 구수한 향이 있다. 햇나물은 햇나물대로, 묵나물은 묵나물대로의 맛이 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양력 4~5월에는 묵나물과 햇나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나물 마니아들이 황홀하게 여기는 계절이다.

 


▲ ‘두루담아’는 장이나 반찬들이 수준급이다. 잘 지은 밥과 정갈한 나물을 비벼먹으면 아주 좋다.

 

‘두루담아’(경기도 여주)에서는 이른 봄, 전호나물부터 각종 산나물, 들나물을 만날 수 있다. 원추리, 각종 취나물, 명이나물(산마늘), 참두릅, 개두릅, 삽주나물, 비비추, 오가피나물, 다래순, 산갓 등이 밥상에 나온다. 각종 나물을 조리하는 방법도 수준급이다. 된장, 간장, 고추장 등 장류도 좋다. 나물 비빔밥으로 만든 주먹밥도 특이하다.

 

▲ ‘걸구쟁이네’는 주인이 나물을 꿰뚫고 있다. 자연에서 채취한 식재료의 맛을 제대로 살린다.

 

‘걸구쟁이네’(경기도 여주)는 널리 알려진 사찰음식 전문점이다. 각종 햇나물과 묵나물도 좋지만 김부각이나 고추부각 등도 아주 좋다. 산초장아찌를 늘 내놓는다. ‘착한식당’으로 선정된 곳이다.

 

▲ ‘경희식당’은 절제된 한상차림을 보여준다. 속리산에서 나는 갖가지 나물과 버섯반찬이 아주 좋다.

 

속리산 주차장의 ‘경희식당’은 버섯 종류들이 아주 좋다.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힘든 꾀꼬리버섯(외꽃버섯) 등을 만날 수 있다. 나물, 고기, 과실 등을 이용한 각종 정과(正果)도 특이하다. 다래순, 오가피나물 등 각종 나물류도 좋다. 서울 교대역 부근의 ‘점봉산산나물’과 영등포의 사찰음식전문점 ‘아승지’도 권할 만하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맛집 정보

  ① 두루담아: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양자산길 215 / 031-882-8255
  ② 걸구쟁이네: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문로 707 / 031-885-9875
  ③ 경희식당: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7길 11-4 / 043-543-3736
  ④ 점봉산산나물: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중앙로2길 8 / 02-595-6660
  ⑤ 아승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로 176 / 02-832-75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