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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짜장, 짜장면에 담긴 추억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짜장면은 한식(韓食)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부분 “진짜? 왜?”라고 묻는다. 짜장면은 중국에서 건너왔고 중식당에서 팔고 있으며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華僑)들 혹은 그 후손들이 지금도 열심히 만들고 있다. 그런데 한식이라니? 현재 중국에서는 한국 짜장면을 ‘한성(漢城)짜장’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짜장면은 삶아낸 면 위에 볶은 장과 다양한 재료를 얹어 비벼 먹는 음식이다. 한국의 짜장면이 달다면 중국의 짜장면은 짜다. 우리가 보기에 일본 기무치가 김치가 아닌 것처럼, 중국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한국 짜장면도 중국음식은 아니다.


‘짜장면’으로 나이를 알 수 있다


한국인은 누구나 짜장면에 대한 추억이 있다. ‘추억’으로 그 사람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잡고 갔던 청요릿집에서 말이야”라고 이야기하면 대략 50대 후반 이상이다. 이 세대에게는 ‘중식당’이 아니라 ‘청요릿집’이다. ‘청요리(淸料理)’는 중국식 고급 요리였다. 짜장면은 청요릿집의 코스 중 마지막에 나오는 ‘식사’ 중 하나였다. 이 세대들은 “요즘은 유니짜장을 잘 하는 집이 없어!”라고 말한다. 유니짜장은 돼지고기를 잘게 다진 후 볶은 고명을 사용한다. 간짜장도 흔하던 시절이다.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 가족들과 함께 먹었던 짜장면이 제일 맛있었다”고 하면 대략 40대 후반 이상의 나이다. 어떤 짜장면이 제일 맛있었냐고 물으면 “학교 졸업식 날” 혹은 기뻤던 날, 슬펐던 날, 어린 시절 좋았던 날, 가족들과 먹었던 짜장면을 이야기한다. “달걀 프라이가 올라가지 않은 짜장면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비교적 젊은 층들이다. 이 세대들은 짜장밥을 먹었고 짬뽕과 짜장을 뒤섞은 ‘짬짜면’도 먹었다. 피자, 스파게티를 어린 시절 먹어본 사람들이다.


어느 한 TV 프로그램에서 ‘착한 짜장면’, ‘맛있는 짜장면’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다. 필자도 검증단으로 출연을 했다. 어려웠던 건 ‘착한 짜장면’, ‘맛있는 짜장면’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었다. 과연 어떤 짜장면이 착하고 맛있는가를 정하는 기준은 검증단 모두가 달랐다. 현장에 나가기 전 기준을 정하는 걸로 오랫동안 회의를 했던 기억이 있다.



‘신승반점’의 ‘공화춘’ 이야기


‘짜장면을 처음 만들었다’는 ‘공화춘(共和春)’은 1912년 문을 열었다. 이 집에서 짜장면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말은 일부만 맞다. ‘공화춘’은 ‘공화국의 봄’이다. 원래는 ‘산동회관(山東會館)’이었으나 공화국 건국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꾼 것이다. 짜장면을 처음 내놓았다는 말은 틀렸다. 짜장면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가정 음식이었다. 길거리 손수레 등에서 팔던 음식이 어느 날부터인가 식당 메뉴가 된 것이다.



‘신승반점’은 ‘산동회관’의 창업주 우희광 씨의 외손녀가 주인으로 있는 집이다. ‘新勝(신승)’은 “새롭게 만들어서 앞의 것을 이긴다”는 뜻이 있다. 예전 ‘공화춘’의 맥을 잇되 그를 뛰어넘겠다는 뜻이 보인다. 이 집에 가면 나이 든 분들이 오래전에 먹었던 유니짜장을 맛볼 수 있다. ‘신승반점’의 유니짜장은 그럴듯하다. 노포의 힘은 이런 오래된 음식을, 꾸준히 내놓는 것이다. 어쨌든 누구나 기억하는 ‘공화춘’의 후손이 운영하는 집으로 의미가 있다.



명동 ‘개화’, 오향장육은 짜장면의 반찬?


사실 미식가나 음식에 대해서 ‘한 말씀’하려면 어린 시절 집안이 넉넉해야 한다. 음식은 먹어본 사람이 잘 안다. 필자는 ‘하루에 버스가 네 번쯤 오는 시골’에서 자랐다. 별로 넉넉지도 않았다. 보릿고개를 겪었지만 다행히 밥을 굶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먹어본 음식이 있을 리 없다. 시래깃국에 김치만 열심히 먹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주변 선배들이 모두 대단한 모주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술꾼들은 열심히 안주를 찾아다닌다.



선배들을 따라서 명동의 ‘개화’를 가봤다. 술꾼들은 밥을 잘 먹지 않는다. 문제는 어린 후배다. 밥값도 내지 않으면서 열심히 밥을 찾으니 우선 짜장면부터 주문해서 안겨준다. 오향장육은 안주다. 시래깃국에 밥을 말고 김치를 반찬으로 먹었던 가락이 있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열심히 오향장육을 반찬으로 먹었다. 그 귀한 술안주를.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필자 추억 속의 짜장면은 명동 ‘개화’의 짜장면이다. 짜장면을 먹으며 귀한 술안주를 반찬으로 먹는 후배가 얼마나 얄미웠을까?



충남 보령 시골의 ‘황해원’ 짜장면


착한 짜장면 검증 차 가본 집이다. 착한 짜장면의 기준에는 맞지 않았지만 참 재미있는 집이다. 짜장면은 원래 일일이 ‘춘장’을 볶아서 사용해야 한다. 윤이 나고 감칠맛, 불맛도 훨씬 좋다. 예전 간짜장이다. 지금은 누구나 푹 끓인 다음 내놓는다. 이른바 옛날 짜장이다.



나이가 들면 웍질이 힘들다. 웍을 쥐고 몇 번 작업을 하고 나면 젊은 주방장도 힘에 부친다. 연세가 일흔에 가까운 이가 주방장이라 해서 ‘가능할까?’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주방에, 부인은 홀에서 서빙하는 작고 소박한 시골 중식당이었다. 역시나 짜장도 푹 삶아두고, 짬뽕 육수도 푹 삶아서 준비해둔 다음 한 그릇씩 퍼주는 곳이었다. 문제는 이 음식점의 짜장면이 수준급이라는 점. 맛있었다. 검증을 하면서 안타까웠다. 나이 든 부부가 소박하지만 참 따뜻한 마음씨로 내놓는 음식이었다.



경기도 양평 ‘진영관’, 나이 든 부부의 전원생활


참 재미있는 집이다. 언젠가 양평을 지나다 우연히 들러본 집이다. 한적한 시골 읍내의 한적한 중식당이다. 규모도 크지 않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손님도 필자 한 사람. 노부부가 운영한다. 홀에는 부인, 주방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짜장면을 먹다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들은 이야기.



원래 서울에서 제법 큰 중식당을 했다. 나이가 들면 중식당 주방 일은 힘들다. 부부는 양평으로 귀촌하기로 했다. 중식당 일은 할 수 있으니 작은 식당 일이나 하면서 노년을 즐기기로 했다. 처음부터 현재 자리에 온 것은 아니다. 한결 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왜 이쪽으로 옮기셨어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재미있다. “하도 사람 많은 곳에서만 살아서 이제 조용하게 살겠다고 갔더니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손님도 없고 너무 조용하니까 그것도 재미없더라고. 그래서 읍내로 옮겼어.” 짜장면을 먹다가, 요즘 말로 뿜을 뻔했다.



사라진 집, ‘광장휴게실’


전북 익산의 농협 부근에 있던 집이었다. 없어졌다. 일일이 웍질로 짜장을 볶고 양은 약 3인분만큼 주던 집이었다. 하도 많이 줘서 곱빼기를 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짜장면도 맛있었지만 더불어 나오는 밑반찬이 전라도의 묵은 지였다. 그래서 익산 언저리에 갈 때마다 들렀는데 어느 날 문을 닫았다.



언제 문을 열지 아니면 영영 사라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름도 재미있다. ‘광장휴게실’. 멸치국수도 팔고, 이런저런 것도 해주는데 즉석 짜장면이라는 메뉴가 제일 좋았다. 혹시 이 집 소식 알면 꼭 연락 주시길. 필자에게는 최고의 짜장면이었다.


본문에 소개된 맛집 정보



  

   맛집 정보


     1.   공화춘: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43 / 032-765-0571

     2.   신승반점: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44번길 31-3 / 032-762-9467

     3.   개화: 서울 중구 남대문로 52-5 대한문화예술공사 / 02-776-0508

     4.   황해원: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6 / 041-933-5051

     5.   진영관: 경기 양평군 양평읍 양근강변길78번길 6 / 031-774-8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