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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상을 차리다

음식평론가 황광해의 식유기
추석이다. 성묘도 하고 차례(茶禮)를 지낸다. 종교적 이유로 제사를 모시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이들도 많다. 제사와 차례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설날, 추석에는 제사가 아니라 차례를 지낸다. 제사는 조상이 돌아가신 날 모시는 행사다. 차례는 설날, 추석 등 명절에 조상을 받드는 행사다. 집에 사당이 있던 시절, 명절이 오면 사당에 간단한 음식을 올리던 행사다. 차례는 제사와 다르지만 요즘은 제사와 차례를 혼동한다. 제사, 차례에 대한 오해는 많다. 원형의 차례와 제사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엉터리다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하자. 제사상에는 어떤 음식을 어떻게 올려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모시는 방식, 제사상 차리는 방식을 따진다. 조율이시, 홍동백서, 어동육서, 좌포우해 등을 들먹인다. 엉터리다. 조선시대에도 제사상, 제사 모시는 방식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제사가 중요한 사회였으니 관심들이 깊었다. 하지만 아무도 조율이시, 홍동백서 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추, 밤, 배, 곶감을 사용한다[棗栗梨柿]는 표현도 없었다. 배는 제사상에 놓고 사과는 놓지 않았을까? 수박은?

▲ 제사는 집집의 사정에 따라서 지내야 한다. 제사의 바탕은 음식이 아니라 정성이다.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홍동백서도 마찬가지다. 동쪽에는 붉은 과일을, 서쪽에는 흰 과일을 놓는다? 조선시대 어떤 기록에도 붉은 과일, 흰 과일을 나누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농담 삼아 묻는다. “그런 귤 같이 노란색 과일은 어디다 두지요?” “사과도 붉은 것이 있고, 푸른색이 있는데 푸른색 사과는 어디다 두지요?” “수박은 푸른 과일인가요, 아니면 붉은 과일인가요?” 

근거도 없는 말이 떠도는 것은 제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틀렸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하고 겉치레에 흐른다. 제사는 집집의 사정에 따라서 검소하게 모셔야 한다. 제사의 바탕은 음식이 아니라 정성이다. 명재 윤증(1629-1714)은 조선시대 큰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아버지 윤선거와 윤증, 우암 송시열 사이의 유교적 논쟁을 바탕으로 한 마찰은 유명하다. 윤증의 시대에 서인 당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렸다. 윤증은 유교 법도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제사에 대해 한 유훈이 재미있다.

▲ 간략하게, 검소하게 마음을 담는 것이 곧 제사다.

“제사상에 떡이나 유과, 전을 올리지 마라” 일손이 많이 들고 당시엔 귀했던 기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검소하고 간략하게 제사를 지내라는 뜻이다. “훗날 경제적으로 어려운 후손이 나오면 제사도 부담이 될 터이니 간단히 하라”고 했다. ‘재물보다는 마음’이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를 따질 일이 아니다.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다. 간략하게, 검소하게 마음을 담는 것이 곧 제사다.


유교는 ‘검소함’을 원칙으로 삼는다

차례와 제사는 유교에서 출발했다. 조선시대에는 천신(薦新)도 있었다. 천신은 ‘새로 난 것을 조상의 사당 등에 바치는 행사’다. 국가도 천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종묘에 천신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천신도 소박한 행사다. 봄철에 미나리가 갓 생산되면 미나리를 천신한다. 보리가 나오는 계절에는 보리를, 계절 별로 생선이 잡히면 그 생선을 천신했다. 천신을 하는 식재료는 정성을 더한 것이었다. 그 계절에 나오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 깔끔한 것을 올렸을 뿐이다. 마음을 더했지 격식을 복잡하게 한 것은 아니었다.

▶ 차례와 제사는 유교에서 출발했다. 조선시대에는 천신(薦新)도 있었다. 천신은 ‘새로 난 것을 조상의 사당 등에 바치는 행사’다.



조선 중기 문신 심수경(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이미 제사의 지나친 화려함을 경계하는 내용이 있다. “제사에 사용하는 물건은 간략하고 쉽게 갖추어야 한다. 지금 사람들은 마음대로 풍성하고 사치스럽게 한다. 가난한 집은 제사나 기제사마저 지내지 않는다. 제물이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폐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이다. 한탄스럽다.” 

제사, 천신, 차례 모두 소박했다. 차례는 제사보다 더 소박하고 검소했다. 말 그대로 ‘차례(茶禮)’다. 음식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차’를 떠놓고 모시는 행사가 차례다. 추석, 설날 등에는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사당에 간단한 음식을 차리는 것이 차례다. 오늘날, 제사와 차례도 혼란스럽고 모두 지나치게 화려하고 겉모습만 따진다.

▶ 제사상에 놓인 이른바 ‘고임음식’은 흔하게 만나는 식재료에 깊은 정성을 더한 것이다. 주로 남자들이 만든다.


조상이 앉는 자리에서 왼쪽에는 밥, 오른쪽에는 국을 놓는다’는 엉뚱한 내용을 본 적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왼쪽에는 밥을, 오른쪽에는 국을 놓는다. 제사를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생각하니 생기는 코미디다. 

김집(1574-1656)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높은 벼슬살이도 했다. 그러나 청렴하게 살았고 재물은 모으지 못했다. “김집은 집이 매우 가난하여 제사에 모양을 이룰 수 없었다. 시제(時祭)를 지낼 때면 제사 음식은 한 신위에 단지 마른 조기 한 마리를 썼으니, 정성에 있는 것이지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후인의 법이 될 만하다” 우리보다 화려한 제사상을 차렸을 것 같은 조선시대에도 분수에 맞는 제사상이 ‘후대의 모범’이라 여겼다.

유교는 ‘관혼상제’다

유교는 사람의 일생을 ‘관혼상제(冠婚喪祭)’로 정한다. 어른이 되고[冠], 혼례를 올린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고[喪], 죽고 나면 제사를 모신다. 일생의 제일 중요한 일들을 ‘관혼상제’로 묶었다. 유교는 ‘장유유서’를 중요시한다. 어른을 모시듯이 조상들을 모신다. 조상이 돌아가신 날, 제사를 모신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이다.

▲ 유교는 일생의 제일 중요한 일들을 ‘관혼상제(冠婚喪祭)’로 묶었다.

조선은 농경국가다. 이 땅에서, 제철에 수확하는 것들을 조상들에게 먼저 보여드린다. 제사의 시작은 이토록 소박하다. 조선시대 내내 제사를 두고 여러 가지 주장이 있었지만 제사에는 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바탕이었다. 이제는 농경사회가 아니다. 어차피 가게에서 제수를 모두 산다. ‘내가 기른 작물’이 아니라 사서 사용하는 제수용품들이다. 화려하게 할 이유가 없다. 제사의 기본은 정성이지 허례허식이 아니다. 

가장 좋은 음식,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은 바로 제사음식이다. 조상에게 드리는 음식이 가장 좋고 정갈한 것이다. 한식 밥상의 최고 정점은 제사음식이다. ‘헛제사밥’은 가짜로 차린 제사음식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이 제사음식이니 제사도 지내지 않으면서 최고의 밥상으로 차린 것이 헛제사밥이다. 지금은 경북 안동에 남아 있는 헛제사밥은 원래 대구, 경남 진주 등에도 있었다. 제사밥보다 더 맛있는 음식, 화려한 음식들이 막 쏟아지니 헛제사밥은 사라졌다.


바나나로 제사를 모신다?

조선시대에는 감귤이 귀했다. 제주에서 한양으로 보낸 감귤을 궁중에서도 귀하게 여겼다. 감귤을 종묘에 천신하고 제사상 등에도 놓았다. 신하들에게 ‘특별선물’로 하사하기도 하고,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감귤을 하사하고, 감귤을 주제로 한 과거도 있었다. 황감제(黃柑製)다. 귀한 것이니 귀하게 사용했다. 귀한 것이니 당연히 제사상에도 놓았다. ‘내가 수확한 것’이 아니지만 귀한 과일이니 제사상에 올렸다.


▶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라고 특별하게 준비할 이유가 없다. 평소 먹던 것들에 정성을 더 더하면 그만이다.


바나나를 귀하게 여기고, 돌아가신 분이 바나나를 좋아하셨다면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일을 종류를 더하기 위하여 굳이 바나나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어떤 과일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천신에는 날고기를 사용하고, 제사에는 구운 고기, 전, 삭힌 고기 등을 두루 사용했다. 생선도 구운 것, 젓갈, 말린 것 등을 사용했다. 평소 먹던 것들에 정성을 더 더했다. 이 땅에서 나는 것들을 두루두루 제사상에 놓았다. 그게 제사다.

헛제사밥 전문점 ‘까치구멍집’

◀ 안동 ‘까치구멍집’은 헛제삿밥으로 유명한 노포. 비빔밥도 좋고 안동의 탕평채도 수준급이다. 반찬들도 정갈하다.

안동댐 부근에 헛제사밥 전문점이 있다. ‘까치구멍집’이다. 지금의 위치 건너편에 마치 ‘까치구멍’ 같이 생긴 작은 초가집에서 헛제사밥과 안동 고춧가루 식혜를 팔았다. 나물비빔밥과 더불어 탕평채 등도 만날 수 있다.

경당 고택의 불천위 제사

경당 장흥효 선생(1564-1633)의 불천위 제사(不遷位 祭祀, 신위를 영원히 사당에 모시는 것이 허락된 인물에게 그 후손들이 행하는 제사)상이다. 안동 장 씨 집안의 가장 큰 제사 중 하나다. 제사는 정성이다. 제사상에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대부분 남자들이 만든다. 가장 소중한 불천위 제사임에도 제사상은 소박하다. 모두 진귀한 식재료가 아니라 정성으로 차린 것들이다.

▲ 경당 장흥효 선생의 불천위 제사. 안동 장 씨 집안의 가장 큰 제사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