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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에서 만나는 하몽과 프로슈토

글_ 김민경(푸드 칼럼니스트)
요즘에는 11월부터 송년회가 시작된다. 주 5일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금요일 회식 대신 목요일 회식, 혹은 점심 회식이 늘어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만큼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추세가 생기며, 단체보다 삼삼오오끼리의 소통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들이 많다.

모임의 분위기와 음식도 자연스럽게 달라지고 있다. 똑같은 삼겹살을 구워 먹어도 이야깃거리가 있는 집을 찾아 나서고, 술자리 대신 체험이나 배움으로 모임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또 술을 마시더라도 양보다는 질, 익숙함보다는 새로움을 경험하고자 한다. 이맘때 애주가들의 식탁에 빠지지 않는 메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햄’이 아닐까 싶다. 햄이라고 하면 통조림에 든, 혹은 핑크빛 도시락 소시지가 생각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취향을 저격하는 햄은 따로 있다.

 

언제부터인가 ‘햄’이나 ‘소시지’는 인공적인 첨가물이 들어간 가공식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햄(ham)은 본래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숙성, 또는 자연 건조 및 훈연하여 만든 ‘고기‘를 일컫는 말이었다. 요즘에 맛볼 수 있는 것으로 ‘하몽(jamon), 잠봉(jambon), 프로슈토(prosciutto)’ 같은 것이다.

 

▲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하몽은 돼지 뒷다리를 숙성시켜 만든다.

소시지는 이리저리 발라 먹고 남은 고기를 모아 창자에 넣어 말려 두고 먹은 데서 시작했다. 소시지라는 말이 '소금에 절인'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니 상하지 않도록 소금에 절여 만들었나보다. 현재의 살라미(salami), 살시차(salsiccia), 초리조(zhorizo)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런 다양한 햄이나 소시지를 조금씩 맛볼 수 있게 만든 메뉴를 흔히 ‘샤퀴테리(charcuterie) 또는 사퀴테리 보드’라고 부른다.

 

‘샤퀴테리’는 동물의 내장이나 특수부위(코, 꼬리 등) 등으로 만드는 가공육을 칭했는데 지금은 다양한 햄이나 소시지를 조금씩 맛볼 수 있는 메뉴 이름처럼 통용되고 있다. 샤퀴테리는 불어이며, 이탈리아에서는 모둠 전채요리 즉, 안티파스토 미스토(antipasto misto)라는 메뉴를 주문하면 다양한 햄과 소시지, 약간의 치즈와 올리브 등을 조금씩 맛볼 수 있게 나온다.

 

▲ 다양한 햄과 소시지, 치즈를 즐길 수 있는 샤퀴테리 플래터

샤퀴테리 혹은 안티파스토 미스토의 주인공을 꼽자면 역시 하몽 혹은 프로슈토라고 할 수 있다. 하몽은 스페인이 고향이다. 돼지의 뒷다리(넓적다리 포함)를 통째로 소금에 절였다가 통풍이 잘 되는 곳에서 최소 6개월, 길면 2년까지 건조 숙성 시켜 만든다. 하몽은 이베리아 반도의 토종 흑돼지로 만든 ‘하몽 이베리코’를 으뜸으로 친다. 이베리코 돼지는 다시 급여된 사료에 따라 등급이 또 나뉜다. 도토리를 먹고 자란 이베리코 데 베요타(iberico de bellota)를 최고로 친다. 이베리코 외에 흰 돼지로 만드는 하몽 세라노(jamon serrano)가 이베리코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프로슈토는 하몽과 비슷한 방식으로 만든다. 이탈리아가 고향이며 그중에도 ‘파르마(parma)’지역의 것이 유명하다. 최대 3년 가까이 숙성하여 완성되는데, 이것을 프로슈토 크루도(crudo)라 부른다. 프로슈토 코토(cotto)는 돼지뒷다리에 소금과 함께 월계수, 후추, 주니퍼 등의 향신료를 문질러 낮은 온도에서 증기로 천천히 쪄서 익힌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아는 ‘햄’의 식감이나 맛과 더 비슷한데 돼지고기 뒷다리로만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 다산 버크셔로 만드는 다양한 육가공품(왼쪽), 하몽은 얇게 썰어 즐긴다. [사진 제공·솔마당]

흥미로운 점은 이 신기한 외국의 햄이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나라 지리산 일대도 흑돼지로 유명하다. 오래전에 맛있기로 유명세를 떨쳤던 우리나라 토종 흑돼지는 이제 지리산에서 찾기 어려워졌지만 이 일대에 분명 맛있는 돼지들이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현재 전라북도 남원에서는 ‘버크셔(Berkshire)’품종의 돼지로 하몽을 만들고 있다. 멧돼지과의 이 흑돼지는 영국의 버크셔가 원산지다. 얼굴, 꼬리, 네 다리의 발목과 발이 흰색을 띠어 ‘육백(六白)’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식 하몽의 원재료가 되는 흑돼지는 우리나라 환경과 수요에 맞게 육종된 특별한 품종으로 ‘버크셔K'로 불린다. 기존의 돼지고기에 비해 육질이 부드러운 편이고, 타고난 육향이 좋다. 건강하게 잘 자란, 품질 좋은 돼지에 지리산 해발 500미터라는 환경이 더해져 남원의 하몽이 완성되고 있다.

▲안티파스토로 잘 알려진 멜론프로슈토(왼쪽) 육가공품을 사용한 다양한 요리들(오른쪽)

우리나라는 여름은 기온이 높으며 습기가 많다. 지글지글 뜨거워도 건조한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여름과 너무 다르다. 습도를 조절하는 것이 관건인데 해발 고도가 높은 지리산이라 그나마 다행스럽다. 남원의 하몽 만들기는 가을에 시작된다. 뒷다리는 10~14kg 정도 되는 것을 골라 소금에 절인다. 5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을 꼼꼼히 바른다. 섭씨 4도 정도의 냉장실에 한 달 정도 둔 뒤 소금을 깨끗이 헹궈낸다. 짠맛이 많을수록 부패로부터 안전하겠지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맛을 만들기는 알맞지 않기에 물에 담가 짠맛을 많이 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매섭게 추운 겨우내 건조가 되고 발효는 봄부터 진행된다. 그렇게 28개월이 지나면 무게가 7kg 정도의 하몽으로 거듭난다. 오랜 숙성 기간을 거치며 기름기가 살코기에 스미고, 자연의 공기와 바람이 배고, 조직이 단단해지면서 전에 없던 맛과 향이 돋아난다. 뒷다리를 그저 걸어두고 28개월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씩 관찰하고 살피며 지나가야 조화로운 변화가 가능해진다. 지리산에서 완성된 하몽의 맛이 스페인의 것과 다를 수는 있겠지만 과연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다.

 

▲ 돼지 뒷다리는 약 28개월간의 숙성을 거쳐 하몽으로 완성된다. [사진 제공·김민경]

남원에서는 하몽 외에도 여러 가지 가공육을 만들고 있다. 발효 가공육으로는 돼지의 넓적다리를 돼지 오줌보에 넣고 발효하는 이탈리아의 명품 햄 쿨라텔로, 우리가 좋아하는 삼겹살로 만드는 짭짤한 판체타(pancetta), 기름기 적은 등심으로 만드는 론지노(lonzino), 목심을 활용한 코파(coppa) 그리고 간 고기와 지방, 향신료를 섞어 만드는 살라미(salami) 등이 있다. 훈연 햄과 베이컨, 여러 종류의 소시지, 이국적인 스타일의 육포도 만들어 선을 보이고 있다. 또한 다양한 햄이 만들어지는 가공장을 둘러볼 수 있는 프로그램, 가공 햄을 활용한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그리고 아름다운 남원 풍경 속에서 쉴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까지 함께 운영하고 있어 한번 가볼만 하다.